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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

남는 건 추억

나는 그동안 잘 알지 못하는 몇 명의 남자애들을 좋아한 적이 있지. 그러니까 유치원을 다닐 때, 그리고 전학을 간 초등학교 3학년 때, 다시 전학을 간 초등학교 5학년 때, 그 다음은 중학교 신입생이 되어 만난 아이를 꽤 오래 좋아했었지. 잠깐 동안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 좋아지기도 했었고, 그러곤 한동안 누군가를 몰래 바라보는 그런 일이 없었지. 그러다가 다시 24살 때 아르바이트를 하던 물류센터에서 함께 일하던 오빠에게 관심을 가졌었어. 그리고, 또 그리고 이제는 조용히 그날들을 사색하는 시간을 갖고 있지. 모두 아주 오래된 일인 것처럼 말이야. 공중에 떠도는 먼지나 내가 들이마시는 산소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때의 일들이 너무나 멀어져버려서 그 시간의 감정은 거의 잊었지.

그들을 볼 때에 내 모습은 어땠을지, 그들을 보는 내 눈빛은 뭐가 달랐을지, 하필이면 나는 왜 그들에게 마음이 갔는지 잘 모르겠어. 그들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내 마음을 사게 되었어. 그렇지만 여전히 이렇게 떠올리면 그들의 특징이 기억이 나. 그들의 특징은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어. 그리고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지. 뭔가 내게도 아주 소중한 것이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여기게 돼.

유치원 때 그 아이는 수줍음도 많았지만 무뚝뚝하기 그지없었지. 나는 그 아이를 좋아해서 한 번도 그 아이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어. 나는 그 아이가 좋아서 말도 걸지 않았지. 그렇게 되면 마음을 들키게 될 것 같았어. 친구들에게 놀림 받는 건 별로 유쾌하지가 않을 테니까 나는 아주 조심스러웠어. 딱 한 번 그 애와 함께 공놀이를 한 적이 있고, 딱 한 번 그 애가 나를 향해 말을 한 적이 있지. 그 두 번의 기억은 그래도 꽤 강렬한 게,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는 거야. 늘 남자애처럼 구느라 머리도 짧게 깎고 치마도 입지 않았는데, 엄마가 억지로 양갈래 머리에 원피스를 입혀 보낸 날이 있었지. 그날 남자친구들에게 얼마나 놀림감이 되었는지,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았어. 유치원 가방을 사물함에 갖다 두러 모두들 우르르 몰려갔는데, 글쎄 옆에서 가방을 넣으면서 녀석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하잖아. “겨울에 무슨 치마를 입어?” 아주 퉁명스러운 말투로. 사실 나만 빼고 여자 친구들은 자주 치마를 입었거든.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그 애가 내게 관심을 표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잘 모르겠어. 그 무뚝뚝한 녀석, 누구든 자기를 좋아하는 티를 내주면 고맙다고 할 게 아니라 더 틱틱대며 상대에게 무안을 주곤 했지. 그래도 영리하고 자기 할 일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어서 나와 달라 보이는 모습에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여전히 생각해도 좀 멋진 구석이 있는 남자애였던 것 같아.

두 번째로 좋아했던 아이는 전학을 간 초등학교에 같은 반 아이였어. 3학년 때 나는 키가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작은 편이었는데, 그런 나보다 더 키가 작은 남자애였지. 키는 작아도 얼마나 야무졌는지 몰라. 장난꾸러기이긴 했지만 심한 장난을 쳐서 여자애들에게 분개를 사는 아인 아니었어. 오히려 모든 친구들이 그 애를 귀여워하고 좋아해주었지. 키도 조그만 게 운동신경도 좋고 말재주도 참 좋았어. 그리고 전학을 와서 모든 게 낯설고 부끄럽기만 했던 나에게 친근하게 대해준 것도 그 아이였지. 그 애와 함께 쉬는 시간에 노는 게 정말 즐거웠어. 함께 뛰놀고 장난도 치고 재미있는 얘기도 나누었어. 그런데 인기가 좀 많았던 게 흠이었달까. 전학을 왔을 때, 당연하지만 나에겐 친구가 거의 없었거든. 이미 친한 사이로 지내는 아이들이 많았으니까 나는 좀 겉돌았어. 원래도 남자 친구들밖에 없어서 여자 친구들을 사귈 생각을 못했지. 그런 와중에 녀석이 내 곁에 와준거지. 운동장에 나가서 그네도 타고 공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쉬는 시간엔 마주 보고서 웃고만 있어도 좋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여자 친구들이 자꾸만 그 애를 데려가 버려서 혼자 있게 되는 날이 많아졌어. 그러다가 하루는 내가 녀석에게 실수를 하고 말았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나는 장난스럽게 그 아이의 팔뚝을 꼬집었어. 그리 아프진 않았을 텐데 평소와 달리 화를 내는 거야.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왜 때리느냐고 따지는데 내가 할 말이 있어야지. 눈만 끔벅거리고 있으려니까 그 애가 자리를 떠났어. 그 담부턴 녀석한테 말을 걸기가 어렵더라고. 가끔씩 내게 장난을 걸기는 했지만 나는 소심하게 받아치기만 하고 점점 더 그 애를 조심스럽게 대했던 것 같아. 그리고 나중엔 아예 소원한 사이가 되었지. 남자애라 그런지 날 금방 잊었나봐. 학년이 바뀌고 어느 날 우리 언니와 함께 방과 후 공부를 함께 하게 되어서 내 이름을 들먹였는데 기억을 못 하더래. 어릴 때의 일인데도 그 얘기 듣고 속이 상했어. 마음이 좀 아프더라고.

세 번째는 초등학교 5년 때 같은 반 아이였는데, 사실 추억이랄 게 너무 없어. 그저 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친구들과의 사이가 안 좋아서 학교 다니는 게 즐겁지 않았지. 그러니까 그냥 장난스럽기만 하고 피부가 하얗기만 하던 그 애를 그리 좋아했던 건 전부 외모 때문인가 봐. 밝은 성격도 맘에 들긴 했지만.

중학교 1학년, 모든 게 새롭지. 낯설고 두려운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만났던 남자아이. 역시 같은 반이었어. 항상 그 짧은 머리에 젤을 바르고 등교하던 녀석. 밝은 분위기에 자신만만한 태도, 다정한 말투는 다른 남자애들에게서 볼 수 없는 모습이었지. 그래도 아마 그 애를 가장 오래 좋아한 이유는 날 보고 예쁘다 해줬기 때문인 것 같아. 남자애가 여자애인 내게 순수한 마음을 순수하게 표현하는 건 그게 처음이었어. 난 그 애를 향해 수줍게 웃은 게 다야. 정말 잘 지내고 싶었고, 친해지고 싶었는데 난 수줍음이 많은 게 탈이야. 결국 그 모든 아이들과 친해지지 못했다고.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평소처럼 재밌게 굴지를 못하겠더라. 1학년이 지나고 다시는 그 애와 같은 반이 되지도 못했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마저 떨어지게 되었는데, 내가 이사를 가게 되었거든. 집이 시내와 멀어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했어. 그리고 그 버스 안에서 녀석을 다시 만났지. 여전했어. 자신만만한 태도 말이야. 반갑게도 늘 함께 다니던 친구와 여전히 친하게 지내고 있었지. 그것만으로도 난 좋았어. 같은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것, 정말 멋지지 않아? 모든 게 엇갈렸지만, 같은 대학교 통학버스에 함께 탈 수도 있을 뻔했는데. 그럴 줄 알았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여자 친구들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대하고 쉽게 말거는 녀석이라 그런지 연애도 참 잘해. 그러더니 결혼도 그렇게 빨리 할 줄이야. 정말 안녕이구나!

고등학생 때 잠깐 좋아했던 영어 선생님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는데. 동료 여 선생님과 결혼해서 잘 지내시리라 믿어. 얼마 전에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지. 청년의 태는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 제법 중년의 선생님 같은 모습이어서 새삼 세대 차이를 느꼈더랬지. 더듬거리는 어리숙한 말투에 그저 느낌이 따뜻해서 좋았는데, 어쩌면 그런 아빠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

그리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지. 너무 오래 아무도 좋아하지 못했어. 그만큼 대외활동이란 게 전무했거든. 학교를 다니고 집에 오고. 학교를 가도 수업만 듣고 올 뿐, 친구도 별로 안 사귀고 남자는 멀리했지. 스무 살이 되었더니 남자들은 하나 같이 능구렁이가 되고 순수하게 친구로 사귀기 어려운 낯선 성인의 모습을 한, 그러나 또래라고 하는 그런 녀석들이 주변에 가득하니까 정말 낯설었어. 그동안 친구였던 남자들은 소년이었는데, 그 소년들은 다 어디 가고 낯선 남성들을 이제 친구로 사귀어야 하다니.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그들을 다 나 몰라라 하느라 나도 참 고생스러웠어. 그렇지만 아무도 모르겠지. 내가 얼마나 숫기 없고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인지를. 아니, 잘 알고 있을까? 그랬는데 내게도 잠깐 마음이 열릴 기회가 왔던 거야. 그곳은 우리 집에서도 꽤 멀리 떨어져있는 물류센터였어. 아빠의 다마스 트렁크에 실려 덜컹덜컹 오래 달려 도착한 곳이지.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추운 창고에서 온몸이 부서져라 떨며 동생들과 의기투합한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해. 처음엔 예쁘고 활달하고 밝고 지각이 잦은 여자 동생과 일했지. 친동생처럼 잘 해주었는데 워낙 지각이 잦아서 곧 잘리고 말았어. 내겐 좋은 일이었는지, 아님 것도 아니었는지 새로 다른 사람이 뽑혀 들어왔는데 남자더라고. 남자는 이쪽으로 잘 안 뽑히는데 워낙 사람이 없으니까 인력을 충당하느라 어쩔 수 없이 썼던 것 같아.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고 그런데도 나보단 숫기가 덜한 그런 사람이었어.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둘 다 너무 숫기가 없어서 별로 친해지질 못했는데, 가끔씩 사탕이나 초콜릿을 나눠주었고, 넘어 다니던 레일을 손수 들어 올리는 매너도 보여줬지. 늘 혼자인 그 사람을 보면서 마음은 많이 가는데 말은 쉽게 떨어지지 않더라. 이럴까, 저럴까 고민만 하다가 한 마디로 놓쳐버렸네. 나보다 이틀인가 먼저 일을 그만두었는데,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지 궁금해.

이제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끝내야 좋을지. 어떻게 끝냈으면 좋겠니? 누구라도 내가 찾아 나서서 결국 좋은 인연이 되었다는 해피엔딩이 필요해? 아마도 다들 잘 지내겠지. 내가 바라보던 그 사람들 아마 다 잘 지낼 거야. 이 정도면 새드엔딩은 아닌 듯하네. 그리고 나도 추억 먹으며 잘 지내니까.

<2014년 6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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