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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링크를 풀기 위한 우류신화 연구서(서~1.1)

다시 써야 할 미완성 장편소설

서(序)

 

2390년대, 만능 실용주의의 시대. 이미 사람들과 사람들을 이어주던 끈은 끊어진 지 오래다. 무슨 이유로 서로가 서로의 낯을 즐겁게 보기를 원하겠는가? 아무 즐거움이 없는 만남에는 유익도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사사건건 간섭하던 지난 때를 생각하며 간혹 코웃음을 치기도 하지만 그때 말고는 웃음도 쓸데없는 감정 소모일 뿐이다. 어쩌면 세상은 너무 멀리 돌고 돌아서 처음부터 와야 할 오늘이 늦어진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어리석은 사람들이 진부하게도 ‘그래도 옛날이 좋았어.’라고 떠들면 누구든 그런 말은 들은 체 만 체 무시하고 만다. 대부분은 ‘무슨 헛소리야? 옛날? 그런 피곤한 생각을 왜 하는 거지? 그냥 오늘을 살라고. 오늘을 살면 내일이 오잖아. 그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세상에 어디 있어?’라고 생각한다. 또는 일부러 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자리를 뜨면 그만이었다. 그럼 ‘그래도 옛날이 좋았어.’라고 떠든 사람은 괜한 객기를 부려본 것뿐이라며 무안해져서 다시는 그런 말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고 살게 되는 것이다.

세상 이치가 이만큼 변하게 되면서 사람들의 생활은 조금 단조로울지 몰라도 살기란 참 쉬워져 버렸다. 이유 없는 싸움도, 이유 있는 싸움도 모두를 피곤하게 할 뿐인 것을 사람들은 차차로 알아갔고 그런 인식은 이제 전 세계에 퍼져있는 기본 상식이 되었다. 너무 한 곳에 사람들이 모여 살 필요도 없었고, 굳이 비행기를 타고 가보지 않은 나라에 여행할 이유도 없어졌다. 어디에서 사나, 어디를 가보나 뻔하디 뻔한 세상이었다. 덧붙여 누구를 만나게 되는 것도, 그게 그리 특별한 일인가? 일상 속에서도 충분히 만날 사람들이었고 어디에서 마주쳤건 그건 단지 그 상황에 맞는 용건이 유연하게 해결되는 수단인 것으로 그만이다. 아무튼 그가 그 자리에 없어서 만나지 못한다면 처음 계획했던 것이 틀어질 테고 어쩌면 이유 없이 시간을 죽이게 될 수도 있고 정력과 재화의 낭비로 이어질 만한 것인데, 그래, 이유 없는 낭비, 소모, 소비라면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 수가 있나? 그런 신뢰 안 가는 인간이라면 당장 절연하고 말지!’라고 함께 욕해줄 수도 있지만 모두가 그런 마음이니까 아마 어떤 인간이라도 감히 약속을 지연시킨다든가 무시하는 일은 벌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이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세상 말이다. 얼마나 먹어야 되는지, 뭘 먹어야 하는지, 따뜻한 집과 따뜻한 음식, 따뜻한 의복이면 인간의 생리를 전부 다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상의 것은 유난을 떠는 짓이다. 예를 들면 때가 타는 물건은 검은 색으로, 무엇이 묻는지 잘 알아보려면 흰색으로, 내용물 확인이 필요한 것은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최선이자 최고이다. 그 이상에 덧칠이나 덧붙이는 짓은 언젠가 물건이 닳게 되었을 때 떨어져나갈 수가 있는데 이런 무의미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아마도 빈둥대고 노는 하층민일 것이고 주변 이웃들의 흉이 되겠지만 사실 그다지 흉을 보지도 않는다. 유난을 떠는 사람을 흉보는 사람도 별스런 이웃인데다, 아무튼 누가 그런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쓰려고 들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아직은 예전 세대가 쓰던 물건들이 많이 남아있는 터라 쓸데없는 재화 낭비를 초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쓰고 있는 것들이 상당수이고 그 요란한 무늬와 문양들, 의미를 알 수 없는 장식들이 새겨진 골동품들을 보자면 지금 사람들은 그런 물건들에게서 묘한 사랑스러움이나 귀여움 같은 것을 때로 느끼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스러움이나 귀여움 같은 것은 갓 태어난 털 있는 짐승이나 아기들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점인데 이런 것을 옛날 물건을 보며 느끼는, 말하자면 특이한 페티시들이 이 시대에는 꽤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페티시라 해도 실은 그 무늬와 장식 같은 것의 의미를 1%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 그것들을 연구할 필요성도 크게 없기 때문에 페티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거의가 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특이한 사람은 있다.’라는 정도에 그친다.

간혹 바다에 몸을 적시고 싶다든가 숲속 공기를 마시기 위해 산에 가는 정도라면 지금 사람들에게 아주 우스꽝스런 일도 아니긴 하지만 가보지 않아도 충분히 그 기분이 어떤지는 잘 알잖은가? 그보다 연료가 덜 드는 가까운 공원에서 숨을 들이 마시고 마을 주변을 조깅하는 정도로도 사람들은 만족하고 있다. 이왕지사 선조가 만들어놓은 공원을 그저 썩혀두는 것도 상당한 낭비이니 말이다.

물론 이전 세대에 대해서 지금 사람들이 전혀 몰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저 사고방식의 차이 정도로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 시대와 현재의 간극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시대를 이해할 만한 수단들은 전부 유물이 되어 지금도 남아있기는 하지만 기록된 전승이라는 것이 실제 경험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은 다들 알 것이다. 유물 중에 많은 수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그런 일도 벌써 꽤 오래전에 끝난 사업이다. 박물관 건물은 생각만 해도 벌써 그 퀴퀴한 냄새와 더러운 공기를 상기시킨다. 예전에는 옛날 물건을 보존하는 사업에 관련한 직업도 여럿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재화 따위를 필요한 만큼 얻고 살았을지 구체적인 사정은 짐작하기 어렵다.

예전 시대의 사고방식은 대다수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한 가지를 꼽자면 ‘예술’이라나 뭐라나 하는 분야이다. 정확히 ‘분야’라는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이 ‘예술’이라는 것이 예전 시대에, 그리고 그 시대를 거슬러서도 꽤 오래된 시대에서부터 꽤나 굵직한 ‘테마’였다는 것이다. 도저히 ‘분야’라고 해야 할지 ‘테마’라고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이것은 우습게도 희귀한 것, 돋보이는 것, 색다른 것, 감정적인 것, 신비로운 것, 인상적인 것 등 주로 이런 식의 소재로 사람들의 감각을 즐겁게 해주곤 했다는 것이다.

‘즐겁다’라는 것도 쉽게 우리 식으로 생각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것은 좀 더 감정과 감성에 치우친 기분 표시인데, 만약 우리 이웃이 “즐거운 식사였다.”라고 말한다면 이 시대의 어감은 우리의 일반적인 느낌보다 훨씬 극적이고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가진 ‘즐거움’의 느낌을 이 시대 사람들에게 말하려면 “배가 부르니 그만 먹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나이 어린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 실례가 되니 “이만하면 만족했다.”라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처럼 예전 시대의 ‘즐겁다’라는 것은 이 시대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 문어다리를 뻗고 있는 어휘인 만큼 ‘예술’은 참으로 설명하기가 난감한 부분이다. 한 번은 이 ‘예술’이 다채로운 느낌을 가진 어떤 것 정도로 이해하고 시간이 아깝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한 편의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태어나 그때처럼 자주 하품한 적도 없었다. 이내 시간과 감정, 에너지의 소비가 떠올라 거북해지긴 했지만 어쩐지 그 옛날의 ‘즐거움’을 조금은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상보다 빠르게 서로의 외모만으로 상대를 깊이 탐구하려는 갈망과 애정을 갖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다양한 외모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을 제외한 인물들은 대부분 지금은 볼 수 없는 특이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함께 공존하는 것조차 희한하게 여겨진다. 어쨌든 그럼에도 심오하고 복잡한 대화와 의미 없는 장면들이 두 사람이 가까워지지 못 하도록 최대한 훼방을 놓으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때로 자신의 감정과 달리 상대에게 폭언을 하거나 거리를 두는 무례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사건들과는 별개로 결국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이제까지 겪었던 갖가지 불행을 천연덕스럽게 잊고 평화로운 생애를 보내는 것이 영화의 말미를 장식하며 끝이 났다. 여기서 내가 보기에 의미 없게 여겨지는 부정확한 표현과 감정 표출은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나 이 점이 현대와 과거를 분명히 선 그어주는 경계라는 것을 느꼈다. 일부러 감정을 자극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요시키는 지루하고 따분한 장치들이 남발하는 것을 참고 보기란 참으로 힘든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조금이나마 그 시대의 문화 코드를 엿볼 수 있었고, 결론으로 얻은 것은 단 하나, 어쩐지 지금의 세계가 무척 편안하고 마치 페티시처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된 구어 중에는 ‘매력적이다.’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장난스러운 사람들이 문틈에 옷이 끼인다든가 종이에 손을 베인다든가 컵을 깨트리는 등의 황당한 일을 겪을 때 상한 기분을 풀기 위해 반어적 표현을 찾던 와중 다시금 되살아난 경우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매력적이다’라는 단어의 표현을 정확히 찾아낸 것 같았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상스런 옛날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영화가 막이 내리면서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기분은 현재 있는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가 막힌 감정이었다.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옛날에 비하면 이 시대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5분이 지나니 다시는 그 기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배워서 알고 있듯이 우리 세대의 유래는 전부 다 한 가지 작은 신화에서 뻗어 나왔다. 처음부터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긴 서두가 필요했다는 것을 말해둔다. 현대인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 작은 신화의 한 음절도 믿을 구석이 없다고 여기고 있기는 하나 우연히 찾아낸 신화 관련 고문서 속 이야기의 구체성이 현대사회를 이해하고 식별하기 위한 발판으로는 유용하다고 생각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길 바라는 마음에 다시금 여기에 그 글을 옮겨 담았다. 물론 여전히 수많은 교재에서 신화의 한 대목 정도는 차용하여 학생들의 현대사회의 이해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는 있다. 그러나 누누이 말하지만 사회 설계부서의 설계자 입장으로서 이 작은 신화는 단순히 신화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다방면에서 지식인들의 연구가 필요하며 우리 다음 세대인 학생들 역시 신화의 전문 정도는 파악을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신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들 말하고 있으며, 심지어 같은 사회 설계부서의 동료들도 신화에 대한 신뢰도가 밑바닥이기는 하나 이제부터 면밀히 밝힐 신화의 전문을 통해 그 모티프를 발견하여 이전 세대와의 미싱링크를 찾아내는 것과 동시에 다음 세대의 행보를 구체적으로 설계하는데 도움을 얻게 되리라는 기대를 걸고 있다.

곧 있으면 임기가 다 되어 그동안 이 자리에 있으면서 이룩한 업적과 사회 기여도를 평가 받는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인데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오랫동안 연구해온 이번의 과업을 공개함으로 신화를 통해 얻어낸 성과와 이 시대 실용주의의 산실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밝혀내어 이제껏 일해 온 대가와 평가의 기준을 제대로 마련할 셈이다. 그 잣대는 반드시 현대의 인식 체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겠지만 그렇다 하여도 이 범상치 않은 신화 속에 감추어진 비밀에 현 시대의 진짜 과도기의 실체, 바로 그 유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재임 21년간의 세월을 뒷받침하여 당당히 고한다.

 

 

 

 

 

 

 

 

 

 

 

 

 

 

 

 

 

 

 

 

 

1.1

 

평범한 대학생활

 

 

 

 

 

 

날씨는 요새 들어 기분 나쁠 정도로 매일같이 맑다. 바라보면 숨이 막힐 듯 끝없이 펼쳐진 파란하늘에 피어난 하얀 뭉게구름이 초록으로 오밀조밀하게 조성된 캠퍼스의 천장을 산뜻하게 장식해주었다. 아침나절 샛노란 햇볕이 수직으로 내리쬐는 널따란 언덕에는 연륜이 느껴지는 오래된 건물들이 한 귀퉁이씩 볕을 쬐고 있었다. 또 그 옆으로는 유연하게 곡선을 넣은 데다 적당히 고지식한 분위기를 풍기는 현대식 건물들이 해마다 생겨나 나름대로 학교의 위상과 학생들의 자부심을 함께 세워가는 것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면 아침마다 오가는 수천 명의 젊은 학생들이 일제히 바쁘게 강의동으로 발을 옮기는 와중에도 얼굴에서는 언뜻 자신감과 활기가 돋보이는 것이었다. 눈에 띄게 멋을 내는 도발적인 여대생이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외제차를 타고 와서는 시간 강사가 타고 온 97연식 아반떼 옆에 바싹 주차를 하고 가는 녀석들이 아닌 진짜 학생들이 이곳에는 보이고 있었다.

비록 며칠째 비구름 한 번 모여들지 않은 창창한 하늘 탓에 허파에 잔뜩 바람이 들어간 학생들이 오후만 되면 각자의 알량한 어른스러움은 벗어버리고 종일 이 시간만 기다렸단 듯이 잔디밭에 우르르 모여앉아서 병따개와 씨름을 하기는 했다. 내리 읽었던 대학 교재들에 숨어있는 성인의 의식과 인식, 무슨 말인지조차 알지 못 하고 중언부언 암기하던 인간의 사회성과 도덕성은 어쩌면 내밀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가 적재적소에서나 사용되어질 뿐 사람 속에서 주도권을 잡아 쥐고 흔드는 놈은 바로 요 병을 따는데 유용하기 짝이 없는 양손 두 짝임이 틀림없었다. 밤새 북소리도 뚫을 법한 혈기 왕성한 청춘들의 고함소리가 이어지고 그리 깊지 않은 밤이 되면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쓰러져서 사타구니를 벅벅 긁으며 도서관에서 늦게 귀가하는 정신 멀쩡한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괜한 술꼬장을 부리고는 하니 새벽녘이 되면 학교가 아니라 쓰레기장으로 탈바꿈한다는 것도 아니 땐 굴뚝같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학교 학생들의 이러한 명성이 청소업체마다 자자한 만큼 계약한 시간보다도 훨씬 일찍 일어나 부랴부랴 달려오지 않으면 벌레고 뭐고 제 똥 치워달라는 민원이 전화통을 불사를 지경으로 들어올 테니 벌써 아침이면 발 빠른 청소부들이 싹 훑은 뒤라 교정을 밟는 이들은 매번 무사안일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필름이 끊겨 어제 일도 삽시간에 잊고 기억을 못 하니 좋을시고 오늘, 내일이라고 다른 하루가 되리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다.

말끔한 얼굴로 일찌감치 등교한 승수는 어제 일도 잘 기억 못 하고 마냥 오늘이 온 것이 흡족한 부류 중 하나였다. 첫 수업이 시작하려면 아직 2시간도 더 남았지만 그는 이 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 매일같이 들뜨는 기분을 주체 못 하고 누구보다 일찍 학교 문턱을 밟곤 했다. 기숙사의 작은 창문으로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이 느껴오면 그때부터 부스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계획하는 게 그의 첫 번째 일과였다. 크게 이렇다 할 바쁜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동기로 들어와 입학 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건민과 그 외 몇 명을 더 불러와 땀나게 농구 한 게임을 해야겠다는 사소한 일들도 미리 계획해두면 괜히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할 일들을 차근차근 세워놓고 하나씩 차례로 성취해나가다 보면 빛나는 미래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것을 마치 도미노 블록을 세웠다가 한꺼번에 쓰러뜨려 장관을 만들어낼 모습이 눈에 선할 정도로 그는 미래에 확신이 있었다.

미래라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순간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장 있을 중간고사에서도 실패의 쓴잔 같은 것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하물며 삼 대 삼 길거리 농구 게임마저도 이기고야 말리라는 승부 근성이 그에게는 가득했던 것이다. 이런 그가 학생회장을 맡고 있다는 것도 그리 대단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1학년 때부터 줄곧 과대표를 역임했고 때가 되니 올바른 수순인 것처럼 당연하게 학생회장직도 그에게 주어졌다. 형식적인 투표, 모두가 원하는 인재상이 학생회장으로 선출되는 것에 동의하는지 이의를 갖는지를 묻는 투표용지가 마지막 기회인 것 마냥 같은 과 학생들의 손에 쥐어졌을 때에는 오히려 승수는 이러한 절차를 밟아가는 것을 옳게 여겼지만 타 학생들에게는 귀찮은 허례허식이기만 했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이 대부분 투표에 불참하면 불이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을 가지고 이번 투표에 참여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승수는 보기 드문 미소년이었다. 간혹 세월이 그 사람을 피해갔다는 표현을 쓰는데 바로 그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군대까지 제대한 완전한 성인 남자인데도 그의 앳된 얼굴은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나이는 세월을 따라가고 있는데도 그의 모습은 그대로 변함이 없어 주변 사람들은 모두들 틈만 나면 그의 동안인 외모에 대해서 얘기하게 되었다. 그의 동그랗고 선하게 생긴 맑은 눈이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라면 특히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희고 고운 살결이었다. 얼결에 그의 얼굴에 손을 댄 남자 선배는 여린 여성의 피부를 함부로 만지는 것 같아 죄스러운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고 했었다. 무엇을 바르지 않아도 새빨간 입술은 웃을 때마다 호탕하게 있는 대로 벌어져 고르게 난 하얀 이와 대조되어 더욱 눈에 띄었다.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숱의 생머리는 바람이 불면 가볍게 이리저리 흩날리어 노소를 가리지 않고 여성들의 모성애를 자극했다. 또 일부러 그의 알찬 목젖의 움직임을 보려고 마실 것을 갖다 바치는 무리도 적지 않았다. 손가락은 또 어찌나 가늘고 긴지 거의 사람들의 손만 보고 마는 매표소 직원들도 그가 돈을 내밀 때에는 어쩐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을 정도다. 그의 낮지만 명랑한 말소리도 듣는 이의 기분을 좋게 하면서 신뢰하게 만드는 데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니 그의 낯을 한 번이라도 더 뵈올 날이 생기면 누구든 사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같은 학과 학생 중에 독보적인 인물이었냐면 그것도 역시 아니라는 말씀이다. 웬일인지 그 해에 유능한 인재들이 이 학과에 몰리게 되었던 것인지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모른다. ‘승수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승수에 견줄 만한 상대가 되는 사람이 바로 그의 단짝인 건민이었다. 두 사람이 친하게 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 둘은 누가보아도 친해질 수밖에 없는 동류였다. 약자가 약자를 알아보듯 강자도 강자를 알아본다 했던가? 그런데다가 승수와 건민이 오래도록 한 형제처럼 친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도 두 사람의 취향이 극명하게 갈렸기 때문이다. 건민은 겉보기와 달리 묵묵한 편이었다. 승수에게는 누구보다도 힘이 되어주는 조력자 역할을 건민은 톡톡히 해내었다. 외모로 보자면 반듯한 쪽은 승수였고 장난기가 보통이 아닐 것 같은 얼굴의 건민이었지만 성격은 그 반대였다. 건민은 보기에 옷차림도 그의 얼굴과 어울리게 통통 튀는 팔색조 매력의 소년 같이 입었지만 웃을 때에는 입만 길게 죽 찢는 것이 다일 정도로 무뚝뚝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성정이 따뜻하고 자상한 때문에 그는 늘 사람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아낌없이 베풀었고 그의 주위에는 항상 친구들로 넘쳐났다.

사려 깊은 마음씨는 때로 건민, 그 자신에게 고민을 낳아주기도 했다. 그는 1학년 첫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사귄 친구들의 중심부를 차지했다. 물론 승수가 모든 무리의 리더였다. 승수와 건민을 중심부라고 하자면 그 주변부는 물결의 파동처럼 차차 가장자리로 멀어지는 모양을 하고 있다. 가장 가까이 지내는 무리에서부터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는 무리, 여기도 알아달라고 애타게 눈빛을 보내는 무리들이 그 주변을 넓게 에워싸고 있었다. 승수였다면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중심에 자신이 선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한편으로 즐기겠지만 건민은 조금 달랐다. 그는 승수에게 쏠려있는 관심이 자신에게도 똑같이 주어져 있음을 별로 괘념치 않았다. 대체로 건민에게서 멀리 떨어져있는 주변 부류는 그저 보이는 것만으로 그가 차갑고 쌀쌀 맞을 것이라 단정 짓고 말 한 마디 걸어볼 엄두도 못내는 터라 건민은 그것을 자신에게 다가오기 어려워함 때문인 것을 모르고 승수와 같은 선상에 자기를 세워두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조금은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건민이었기에 아마도 그의 사려 깊은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좀 더 조심성 있게 굴었으면 이후의 일은 전혀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진작부터 하려던 일을 고심하고 갈등한 끝에 처음에 순수하게 가진 동기를 잊지 않고서 다시 시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이 아침의 밝은 태양을 유달리 싫어하는 별난 사람에게 해버린 오지랖 넓은 결정이었다는 점이 아마도 모든 앞으로의 사건을 틀어지게 만든 최대의 오류였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건민을 신경 쓰이게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였다. 언뜻 보면 보통의 여학생들과 놓고 보아도 별다를 것이 없었는데도 그녀 자신은 보통이 되기를 거부했다. 우리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지금이야 그녀가 알아서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조용히 강의실에 와서 수업만 듣고 가주는 것을 선후배, 동기 할 것 없이 반겨하고 있지만 1학년 첫 학기 첫 수업,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검은 긴 생머리에 새하얀 롱코트가 그녀의 첫인상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고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우리는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아무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고 곧 구석 자리에 서둘러 앉아버려서 그녀가 같은 학과에 들어온 신입생이자 동기인 것을 알아챈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때때로 복수전공을 하는 낯선 얼굴의 타 학과 학생들이 그렇듯이 튀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도 없잖아 있어 우리도 그런 사람일 거라고 동기들은 은연중에 그리 생각하고 말았다.

모두에게 낯설고 어색했던 첫 수업이 끝나고 대학 생활을 처음 맛본 신입생들이 들뜬 기분을 감출 수 없어 왁자해지고 있을 때였다. 이미 과대표로 발탁된 승수가 교수님이 자리를 떠난 강단에 올라가서 신입생들 전체에게 강의실을 떠나지 말라고 말하기 전까지도 여전히 우리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모든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이 강의실을 다 떠나주길 기다리고만 있던 승수는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가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기요, 죄송하지만 지금은 우리 과 신입생들끼리 회의할 것이 있습니다. 잠깐 자리를 비워주셔야겠네요.”

 

우리는 공손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승수의 말투에 살짝 기가 죽어 길게 늘어뜨린 머리에 얼굴 절반을 가린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저도 신입생인데요.”

 

승수는 우리의 대답에 금방 태도를 바꿨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승수에게는 하나도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어딘가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초연한 데가 있었다.

 

“정말? 그런데 처음 보네. 이름이 뭐였지?”

 

우리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승수에게 말했다.

 

“우리.”

“우리?”

 

승수는 용케 알아듣고 우리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난 승수야. 내가 과대표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잘 부탁해.”

 

승수의 담담한 말투 때문에 우리는 더욱 조바심이 났다. 이미 등 뒤에서 소란이라도 난 것처럼 쑥덕대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승수는 우리가 내성적인 사람인 것을 단번에 알아보고 그녀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혼자서는 동기들과 친해지기가 어려울 거니까 이왕 과대표가 된 김에 누구 한 명이라도 겉도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잘 단합하게 만드는 것도 자기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승수는 다시 강단에 올라가 왼손을 쭉 펴서 한쪽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있는 우리를 가리켰다. 우리는 승수의 입이 떨어지기 전부터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얘들아, 여기 봐봐. 우리랑 같은 학번 동기야. 다들 처음 보지? 우리야, 일어나서 자기소개 좀 해줘.”

 

승수는 아무런 악의도 없이 모두의 이목을 우리에게 집중시켰다. 기억하자면 우리에게는 이날의 일이 학교에 입학한 이래 최악으로 불운했던 일화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끔찍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승수는 여전히 당당한 미소를 머금고 우리의 등을 밀어 격려해주고 있었다. 모두가 승수와 한 마음인 것인지 강의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우리는 목이 타는 것 같으면서도 자꾸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그러나 강의실이 너무 조용해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도 내지 못해 가만히 입에 침을 머금고 있었다. 우리는 긴장과 불안으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강의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있었고 동기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학교 건물이 뺑 둘러쳐져 있는 교정 한 가운데에 그녀가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는 곳곳마다 건강하게 웃음 짓는 여러 무리들이 새들의 지저귐보다도 듣기 좋은 소리로 떠들며 지나갔고 그들의 재잘거림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충만한 생동감이 화단의 마른 잎사귀들까지도 생기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 가운데 우리만 어울리지 않는 그림처럼 황당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자취방으로 향했다. 나중에는 거의 뛰다시피 아니, 날다시피 전속력을 다했다. 맞은편에서 천천히 산보하며 걷던 사람들이 돌진해오는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인도 밖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달음질쳐 빌라에 도착했다. 그리곤 열쇠로 딴 현관문을 벌컥 열고 몸을 던지듯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칠게 숨을 내뱉다가 언뜻 아래를 내려다보니 신발을 신은 채로 들어와서 방바닥에 흙이 잔뜩 떨어져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강의실을 뛰쳐나온 순간이 떨쳐지지 않고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우리는 무엇이든, 어떤 사물이든 눈에 들어오길 바라며 눈알을 굴렸다. 그녀의 눈이 싱크대 위 수납장을 향했다. 곧바로 수납장 문을 열어 파란색 배경에 초록색 물풀이 그려져 있는 동그란 원통을 꺼내어서 책상 가장자리에 올려놓은 어항에로 가져갔다. 우리는 차갑게 얼은 손으로 뚜껑을 천천히 열고 그 안에 든 동그란 먹이를 손가락으로 조금 집어서 어항에 담긴 물 위에 뿌렸다. 색색의 먹이가 수면 위에 동동 떠다니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가쁘게 몰아쉬던 숨이 차차 편안해지고 있었다.

물고기가 잠을 자고 있는지 금방 먹이를 물지 않았다. 우리는 손가락으로 어항을 노크하듯 조심스럽게 두들겨 물고기를 깨웠다. 잠에서 깬 물고기는 조금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수면으로 꼬리를 흔들며 떠올라 먹이를 전부 삼켰다. 물고기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면서 우리의 마음은 차츰 편안해졌다.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었지만 날이 선 듯 구겨진 이맛살이 평소대로 돌아와 바깥쪽이 위로 향했던 사선이 한 모금 뱉어낸 숨과 동시에 안쪽이 위로 향하는 사선의 눈매로 변했다. 그제야 다시 현관에 신발을 벗고 빗자루로 방바닥에 흩어진 모래를 쓸어버렸다.

8평 남짓한 사각형의 원룸에는 어지러운 살림이 벽 한구석도 남기지 않고 구석구석 들어차있었다. 침대는 아침에 일어난 모습 그대로 이불이 돌돌 말려있고 그 위에 옷가지가 구겨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누런 때가 낀 버티컬은 그 위에 늘어뜨려져 줄무늬로 된 빛이 조금 새어들어 왔다. 우리는 옷장의 지퍼를 열어 벗은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집어넣었다. 양말은 벗어서 아무렇게나 화장실 문 앞에 집어던지고 침대 위로 올라가 머리맡에 등을 기대앉았다. 자연스럽게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어항 속 작은 생명체에게 서글픈 눈빛을 보내니 녀석은 익숙한 듯 꼬리를 내려뜨리고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상관이야? 그치?”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뻣뻣하게 등이 배겨오자 좀 더 편하게 있으려고 허리를 펴고 누웠다. 조금 있으면 오후 수업이 시작될 텐데도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무거워진 눈꺼풀을 끔벅이며 몽롱해오는 기분에 취해 들었다. 소리 없이 시계 침의 방향이 바뀌며 버티컬 틈새로 들어오던 빛도 옅게 흐려졌다. 조금이나마 들던 밝은 기운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우리의 방 안에는 적막과 어두움만이 남았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것은 오후 8시가 다 되어서였다. 방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어항에 반사되어 천장에는 은은하게 물결치는 빛이 흐르고 있었고 우리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망연히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이불을 걷어내려고 팔과 다리를 벌려 다빈치의 인체구조 그림처럼 위아래로 움직이다가 벌떡 일어나 앉아서 눈에 낀 눈곱을 먼저 떼어냈다. 바닥에 발을 대니 시릴 정도로 찬기가 돌아 형광등을 켜고 보일러 온도를 높였다. 불편하게 종아리를 꽉 조이는 바지를 벗어던지고 헐렁한 체육복 바지를 배까지 끌어올려 입고는 소형 냉장고를 열어 밑반찬 몇 가지를 싱크대 위에 꺼내놓았다. 코드를 뽑아둔 전기밥솥에는 딱딱하게 말라붙은 찬밥덩이가 한 끼니 때울 만큼 남아있었다. 우리는 밥솥을 통째 들고서 숟가락으로 열무김치와 호박 나물을 찬밥에 대강 비벼 선 채로 저녁을 해결했다. 금세 시장기가 가시자 목이 타는 듯 말라와 냉장고에 넣어둔 주전자를 꺼내 부리에 입을 대고 급하게 보리 끓인 물을 들이켰다. 그 바람에 사레가 걸려 된 기침을 눈물이 고일 정도로 몇 차례 하고 나서야 죽다 살아난 것같이 우리는 한숨을 돌렸다. 고개를 올려 시계를 보니 8시 20분이 조금 넘었다.

 

“깨어있으면 왜 이렇게 시간이 느려지지?”

 

시계를 한 번 노려보더니 우리는 익숙한 듯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로 궁금해서 소리 내어 말하기까지 한 것이기도 했다. 잠깐 눈만 붙이다 일어난 것 같은데 무려 5시간이 오간 데 없이 빠져나간 것이다. 우리가 눈을 감고 자는 동안 제멋대로 시계 침을 조작하며 농간을 부리다가 주인인 그녀가 눈을 뜨는 시간에 맞춰 시계는 모른 척 딴청 피우며 괜히 곡명 없는 휘파람도 불어대면서 원래대로 제 시간에 맞춰 똑딱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우리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누구라도 시간의 상대성 이론을 증명해내기만 한다면 노벨상의 전 분야를 석권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잖아도 매일매일 우리는 자기 손에 들려진 수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풍선이 나날이 공허하게 바람을 빠트려먹어서 크기가 눈에 띄게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수명의 풍선을 자기처럼 함부로 줄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수명에서 바람을 빼주는 대신에 명성의 풍선이나 돈의 풍선이나 권력의 풍선이나 아님 그 세 가지 전부에다가 바람을 넣어주고 있을 것인데 자기만 공기 중에 공기만 더하는 무의미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였다.

 

“시간 같은 건 한 번 가출하면 영원히 안녕이야. 맞아, 단 한 번 지구를 스치고 지나가는 떠나간 혜성처럼.”

 

혼자 무언가 중요하게 들리는 말을 하고 있으면, 깊은 밤일수록 왠지 혼자 사는 사람만의 낭만을 가진 것처럼 상상이 돼서 우리는 자주 이런 식으로 중얼거렸다. 이럴 때 타먹는 믹스 커피라도 찬장에 있었으면 하고 괜한 허영도 품어본다.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잊고 싶은 끔찍한 실수들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다. 그녀는 당장 내일 있을 또 다른 전공 첫 수업 같은 건 조금도 머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최대한 차단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도 똑바로 보지 못한 과대표 승수라는 녀석, 그런 사람은 전혀 알지 못 하는 이방인이라고 저쪽 구석으로 몰아내버렸다. 더불어 다 잊어버렸기를,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기를, 실은 밤새 그것만을 빌고 또 빌었던 우리였다.

여전히 방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우리는 책상 앞 의자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앉았다. 자기 얼굴이 잘 보이게 각도를 맞춰놓은 탁상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에 새로 난 여드름 같은 것을 만졌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살살 문지르며 딱딱한 뾰루지가 만져지면 가차 없이 손톱으로 긁어서 노란 피지를 떼어내 버렸다. 아직 덜 딱딱해졌어도 더 이상 만져지는 게 없을 때는 그런 것도 손을 본다. 결국 여물지도 않은 맨살을 손톱으로 잡아 뜯다가 피를 보았다. 휴지를 한 장 뜯어서 피가 고인 이마에 살짝 갖다 대자 휴지에 피가 스며들면서 따끔거리는 아픔이 전신을 싸하게 타고 돈다. 묘한 희열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휴지로 상처를 만지게 만든다. 두세 번 닦아내다보면 작은 상처는 이내 아물어 따가운 통증도 금세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는 또 다른 신세계를 찾아내려고 손가락 끝의 섬세한 감각을 사용해서 이마에 난 뾰루지를 탐색한다. 그렇게 거울의 나라에 푹 빠져서 이마만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마의 내부에서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이 생각 저 생각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며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현관 앞에 던지듯 내려놓은 가방의 지퍼를 잽싸게 열었다. 가방 안에 반쯤 고개를 파묻고 두 손으로 안에 든 것을 빼기도 하고 주머니마다 뒤적거리더니 마침내 어두운 가방 안에서 찾고 있던 물건이 손에 만져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손에 잡힌 휴대폰을 꺼내어 화면을 틀었다. 화면 하단에서 전화 키패드를 켠 우리는 곧장 고민도 하지 않고 전화번호를 거침없이 찍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컬러링이 없는 단조로운 전화 연결음이 우리에게는 귀에서 가장 편하게 들리는 소리 같았다. 잠시 엄마의 자궁 안에 있는 태아가 된 것처럼 눈을 감고 ‘뚜르르’하면서 뭔가가 동그랗게 말리는 것 같은 소리에 집중했다.

 

<“우리야! 너무 늦게 받았지? 화장실 다녀오느라…….”>

 

우리의 귀로 다정한 친구의 목소리가 저 너머에서 안개에 덮인 것 같이 멀리서 들려왔다. 정말 우리는 안개가 잔뜩 깔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곳에서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언제나 가장 가까이에서 들어왔던 친구의 목소리였는데, 그 목소리에는 모습도 함께 담겨있었는데 우리의 눈앞에는 압도될 것 같은 어두움과 아득한 안개뿐이었다. 우리는 또 본인도 느끼지 못 하는 사이에 울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은 늘 작은 통에 꽉꽉 억지로 눌러 담아놓았다가 모르고 뚜껑이 열려버리면 이렇듯 극단적으로 터져 나오기 일쑤였다.

 

<“우리야, 울지 마! 너 울면 나도……!”>


우리는 첫 마디서부터 자존심을 굽히고 싶지는 않았다. 친구의 동정이 싫지만은 않지만 우리의 눈물이 오랜만에 연락받은 친구에게는 반갑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안 울어.”

 

우리의 대답에 내심 친구가 안도하는 것이 느껴져 우리는 조금 서운해졌다.

 

<“우는 거 아니지? 오늘 학교 어땠어? 친구 많이 사귀었지? 교수님은 어떠셔? 수업은 재밌었어?”>

 

재미있는 것은 동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 서운해 했던 마음이 동정을 받게 되는 순간 지워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기어코 자존심 강한 동물인 척 가장했다. 쏘아대는 말투는 가깝고 편하게 대해주는 사람에게만 쓸 줄 알면서 원래부터 본인이 강한 성격의 사람인 양 스스로를 여기며 함부로 남발하기도 했다. 적당히만 못되게 굴면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변치 않고 그녀를 사랑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넌? 왜 내 걱정만 해. 너도 나랑 똑같잖아.”

 

그것은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유리한 위치에 그녀를 세워주기도 한다. 그러나 곧 수그려야함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더 다정하고 더 사랑해주는 쪽이 우위였다. 우리는 내려오는 사랑의 열매를 어떻게든 몸부림치며 받아먹으려드는 쪽이었고.

 

<“참 그렇지!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좀 낯설기는 한데 그래도 신기하고 재밌더라. 너도 지?”>

 

그런 불변의 법칙을 구슬 꿰듯 하나하나 맞춰가면서 우리는 다음 구슬을 조심스럽게 꺼내보였다.

 

“나도 잘 모르겠어. 유현아, 사실 나…….”

 

도저히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밤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별로 어렵지도 않았을 일일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아마 우리를 이해할지는 모르지만 우리와 같은 상황을 만드는 사람도 있을지는 정말 모를 일이다.

유현이는 우리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만 주었다. 유현이는 우리의 친구여서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유현이도 종종 보았다. 우리가 사지에 몰린, 아니면 구석에 몰린 생쥐 꼴이 될 때마다 그녀가 어떻게 돌변하는 모습을 보였는지 학창시절을 함께한 사람으로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달랐다. 일 년마다 학급이 바뀌는 식으로 매해 새 출발이 가능하던 시기는 지났다. 그럼에도 그녀가 돌이키기 어려운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차마 알리기도 어려워서 답답한 심정이었다. 유현이가 일부러 말해주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자신이 한 실수 때문에 자괴감에 빠져들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무슨 말을 해주면 우리의 마음이 한결 편해질지 고민이 되어 머리를 최대한 굴려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녀에게 기대면 기댈수록 커지는 부담감이 목을 조여오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미안해서 유현이는 우리가 스스로 전화를 끊을 때까지 벨이 울리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만 있다가 재빨리 우리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전화를 받고나서는 그래도 이번에는 우리가 좋은 일로 연락 줬기를 바라는 작은 기대를 했는데 그마저도 역시나 빗겨나가고 만 것이었다.

유현이는 우리의 연락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종일 설렘과 긴장, 밝고 재미있는 친구들, 전에 없던 선후배 관계 같은 대학교에 갓 입학한 신입생만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입문한 즐거움에 흠뻑 도취되어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밤새 그 유희를 나눌 참이었다. 방 한 편에 세워둔 전신거울 앞에는 신고 나갈 새까만 구두와 빨간 앙고라스웨터에 두꺼운 모직 미니스커트, 레깅스와 모자가 달린 너구리 털 야상을 미리 맞춰서 가지런히 포개놓았다.

우리에게 있었던 일은 그리 복잡한 내용이 아닌데도 부가적인 설명이 늘어나 이야기는 점점 길어져서 두 사람의 기분 또한 그에 따라 밑으로 축 처지기만 했다. 유현이는 우리의 말을 거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면서 지친 얼굴로 자주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화장은 끝내놓았기 때문에 그럭저럭 30분 정도만 남아도 여유 있게 준비할 것 같았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는 이미 다 들은 내용을 다시 숙지하는 정도를 지나쳤기에 슬슬 입질을 줘서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유현이는 본인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기분을 풀어주고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주입해주면 단순하게 해결될 일이었다. 막상 그 외에 어떤 일도 유현이가 해결해줄 수 없다는 타당한 제약이 있으니까 우리도 기꺼이 체념해줄 것이다.

 

“내가 만약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냥 네가 어디 아파서라든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런 걸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내가 보기엔 그리 큰일도 아닌 것 같은데?”

<“너한텐 큰일이 아니겠지.”>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입장이라면 그렇다는 거야.”

<“글쎄……. 다들 엄청 놀라서…… 뒤에서 누군가 ‘헤!’ 이런 소리도 낸 것 같았는데.”>

“잘 모른다며. 너무 정신없이 빠져나와서 밖으로 나온 줄도 몰랐다며.”

<“응.”>

“우리야, 어차피 네 얼굴도 모를 거야. 그 사람들 너 처음 봤다며. 내일 수업 한 번 가봐. 아무도 네 얼굴 기억 못 할 걸?”

<“그런가?”>

“그리고 혹시 기억하는 사람 있어서 너한테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그냥 그렇게 둘러대. 아파서라든가…….”

<“잘 모르겠다. 특히 걔, 승수라는 애는……. 다 걔 때문이야.”>

 

이미 이것도 여러 번 한 얘기였다. 승수라고 하는 과대표 녀석에 대해서도 이미 한 차례 험담에 동조해주었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이야기를 빌미로 밤새 자기 곁에 놔두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유현의 뇌리를 스쳤다. 그러자 갑자기 짜증이 났다. 이제 정말 마지막 보루로 여긴 20분만이 외출준비로 남은 시간이었다. 유현이는 우리에게 가장 잘 통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잘 통하기는 해도 유현이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런 짓은 어쩌다 한 번 할까 말까 했던 짓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승수라고 하는 얼굴도 성도 모르는 남자애에 대해서 불평을 쏟아 붓는 것이었다. 그런 우리의 귀로 나지막이 한숨을 깊게 쉬는 소리를 내었다. 금방까지 그 어두운 목소리로 잘만 조잘대던 우리가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리곤 곧 이런 말까지 했다.

 

<“아무튼 그래. 그래도 내 얼굴, 승수 말고는 아무도 못 봤기는 했어.”>

“그래, 괜찮을 거야.”

 

한숨 한방에 여지없이 백기를 드는 우리에게 유현이는 다정하게 말했지만 말투는 조금 건조하게 나갔다. 우리의 말을 끊어놓고도 작별인사를 하느라 5분은 더 소요해야했다. 전화가 끊어지는 대로 유현이는 매고 갈 가방에 휴대폰을 집어넣고 부랴부랴 전신거울 앞에 깔아놓은 옷을 집히는 것부터 마구잡이로 입었다.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도 특별히 무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짧고 마른 다리로 토끼처럼 뛰어다녔다. 거의 밑바닥으로 깔리기 직전까지 갔던 기분이 다시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유현이는 그처럼 천성이 밝았다. 우리와는 정반대로 말이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라면 질러댈 수도 있었다. 마음으로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기분 째진다!’

 

아무래도 우리는 유현이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아버린 게 틀림없었다. 말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그런데 그 말을 한두 마디도 아니고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혼자 떠들어댄 건지, 우리는 다시 자신에게 화가 나서 진작 피폐해진 기분을 완전히 잡치고 말았다. 이대로 내일이 온다면, 아니, 분명히 이대로 내일이 올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애써 유현이가 해준 말을 기억했다. 아무도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 했다는 딱 한 가지 정황에 우리는 모든 것을 걸었다.

화장실 문에 등을 기댄 채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보는 우리의 엉덩이로 미지근한 기운이 올라온다. 이제야 좀 방이 덥혀지는 낌새다. 우리는 버릇처럼 팔 하나를 세워놓은 무릎에 받쳐놓고 이마를 만졌다. 아까 피가 고였던 게 지금은 벌써 다 굳었다. 우리는 그것을 또 다시 억지로 떼어냈다. 딱지를 떼자 손가락 끝에 무언가 촉촉한 게 만져져서 손가락에 무엇이 묻었나 내려다보니 손톱 틈으로 피가 스며들어 있었다. 몇 번이나 앉은 자리에서 딱지를 떼고 굳히기를 반복한 끝에 우리는 마지못해 침대 위로 올라가 잠을 청했고 그동안 방은 완전히 훈훈해졌다.

 

사실 우리에게는 첫 학기 첫 수업을, 그것도 무려 전공수업을 빼먹었다는 사건보다도 더 중요한 스케줄이 남아있었다. 물론 입학 전에 날 잡아 행사하는 신입생을 위한 예비 교육 모임도 빠졌으니 그녀에게는 이것도 별로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최소한 그런 스케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했다면 참석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날려버리진 않았을 거란 얘기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없겠지만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놀랍고도 이색적인 경험이었던 그녀의 강의실 탈출 사건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안타깝게도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확히 각인되었다. 그녀의 길고 탐스러운 머리가 마치 라푼젤이라도 된 것 마냥 휘날리며 강의실 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모든 사람들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효과를 얻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그녀의 얼굴을 보았었다. 그녀만 아무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거기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와는 다른 공간에서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이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기억과 달리 그녀는 줄달음쳐서 강의실을 빠져나간 게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승수를 노려보았다. 적어도 강의실에 있던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그리고 그녀를 보고 있던 관중들을 향해서도 짧지만 강렬하게 눈빛을 쏘아주었다. 물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그녀가 당황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설마 그녀가 강의실 밖으로 그렇게 천천히 씩씩거리면서 문짝이 떨어져나가라 세게 ‘쾅!’ 부술 듯이 닫고 나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다. 강의실이 아니라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도 그 소리 덕분에 우리의 얼굴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천천히 걸어 나온 그녀는 동공을 심하게 떨더니 갑자기 달음질쳐 계단을 내려갔다. 복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서로 서로를 쳐다보며 호기심이란 안테나를 바싹 세웠다.

강의실은 곧 아연한 상태가 되었다. 승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강의실의 소동을 잠재우려고 손뼉을 쳐보았지만 되도 않는 일이었다. 자신도 절로 얼굴이 찌푸려져서 두 눈을 질끈 감고 커다란 손바닥 안에 얼굴을 숨겼다. 같은 과 동기들은 서로가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난리법석이었다. 잘 들어보면 게 중에는 한 사람도 정답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 낯선 여자가 이유 없이 화가 난 것으로 보았고, 몇 사람은 지나치게도 ‘미친년’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게 아니면 여학생들은 조금 예민한 사람이 아니겠냐고 나름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건민만이 유일하게 우리의 눈빛을 바로 읽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겁먹었다는 것을 왜 아무도 인지하지 못 하는지가 오히려 이해되지 않았지만 건민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도 우리가 겁먹었다는 것 말고, 왜 겁을 먹었는지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었다. 건민은 그녀의 선명한 얼굴선을 떠올렸다. 어딘지 모르게 영민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다부진 입술을 보면 카리스마도 있어보였다. 그리고 동그랗지만 끝이 날카롭게 올라간 기다란 눈매와 갈색 눈동자는 그녀의 모든 말을 대변해줄 법했다. 어딘가 어둡고 우울한 모습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우선 보기에 건민은 그녀 정도면 훌륭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건민의 앞에 앉은 도경이가 돌아보며 자꾸 무어라고 말에 말을 붙이며 주변 동기들의 흥미를 끌었지만 건민은 그런 식으로 사람의 약점을 가지고 노는 모습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승수는 다른 식으로 기분이 언짢았다. 그는 한참을 끈기 있게 상황이 종결되기를 기다렸고 도경이가 조금 조용해진 틈을 타서 다시 한 번 손뼉을 쳐 주의를 환기시켰다. 승수는 상했던 기분을 풀고 오히려 아까의 긴장된 분위기보다 단합되어 들뜬 상태가 된 것을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오늘 저녁 6시 50분에 무슨 일 있는지 다들 알고 있지?”

 

수더분하고 말 많은 주희가 손을 동그랗게 말아 입부리에 대고 “1학년 기합.”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모두가 킬킬대고 웃었다. 확실히 아까보다 동요가 더 심해진 들뜬 분위기가 된 것이 분명했다. 승수도 그 말에는 미소 지었다.

 

“……이 아니고 박주희만 어디 혼자 가서 기합 받으라고 하고 우린…… 신복학생 환영회 하러 가자!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다 와야 해. 가서 처음 뵙는 전공 교수님들께 신상 얼굴도 보여드리고 이제 곧 우리 밥줄이 되실 선배님들 라인도 잘 타려면 오늘이 진짜 중요한 거야. 오후 수업도 다 같이 듣는 거니까 그럼 수업 다 끝나고 바로 소모임실로 모이기로 한다. 점심 맛있게 먹고 이따 다시 보자!”

 

승수의 말이라면 정말인줄로 믿는 대다수 동기들은 그의 말대로 환영회란 무척 중요한 모임일 테니까 함부로 빠질 생각을 하지 못 했다. 실은 마음에도 없는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놓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신상 얼굴’이라든가 선배들을 ‘밥줄’ 따위로 여기고 있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여기도록 나머지 사람들을 움직이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그의 말에 휘둘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승수의 이런 속내를 아는 건민이라고 해서 억울하게 생각한다거나 승수를 교묘한 모사꾼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승수의 말을 정말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한심하고 따분한 존재일 것이다.

승수의 주도 하에 테라스가 있는 식당으로 간 무리 속에서 건민은 자기 어깨에 팔을 얹고 쉬지 않고 떠드는 도경의 독백을 잠자코 웃으면서 들어주고 있었다. 도경의 말끝마다 어지간한 대꾸도 다 해주고 있었지만 정작 마음은 딴 데 가있었다. 그리고 승수는 그런 건민을 보고 있었다.

밥을 씹지 않고 삼키는 족속의 후예라고 자기를 소개했던 재희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서 담배를 태우며 세 사람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먹냐? 밥 먹고 뭐 할래?”

 

도경이가 건민의 어깨 위에 올린 팔을 풀며 대답했다.

 

“서점 가자, 서점. 아까 교재 사라고 하셨잖아, 교수님이.”

 

다시 재희가 말했다.

 

“넌 돈이 썩어나니? 난 중고나 인터넷으로 알아볼 건데.”

 

도경이가 건민의 몸을 흔들며 말했다.

 

“건민이 넌 어떻게 할래? 나야, 재희야?”

“난 있어.”

“벌써 샀어?”

“아니, 주셨어.”

 

재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건민에게 물었다.

 

“누가?”

“그때 그 누나가.”

“뭐야? 이런 차별이 다 있어?”

“승수야, 넌 우리 편이지?”

 

도경이가 호들갑을 떨며 승수에게 물었다. 밥을 우물거리며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승수가 대답했다.

 

“나도 있어.”

“뭐?!”

“근데 너 가져. 재희도 필요하면 네 것도 갖다 줄게.”

“그럼 너는?”

“난 내가 알아서 할게. 야, 여기 어때? 우리 밥 먹고 여기 가볼래?”

“어디 어디?”

“어딘데?”

 

승수가 보고 있던 자기 휴대폰을 뒤집어서 세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건민이도 밥을 먹다 말고 물끄러미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인터넷 검색창이 띄워져있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자세히 보니 검색창 커서 옆에 여섯 글자가 찍혀있었다. ‘이건민 마음속.’

도경이와 재희가 어이없다는 듯이 승수와 건민을 번갈아보며 크게 웃어댔다. 승수가 하얗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건민이를 보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건민이도 쑥스러운 듯 고개 숙이고 웃었다. 그리고 달의 반대편에서는 어둠 속에 가려진 의문이 피어올랐다. ‘승수는 어떻게 알았을까?’ 건민이는 다른 사람에게 속내를 쉽게 들키는 유형이 아니었다. 시원하게 벌린 입으로 크게 웃는 승수의 모습은 남자인 건민이 보아도 너무 잘생겨보였다. 그의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 모든 의문을 불식시키고도 남는다. ‘승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건민은 이렇게 생각했다. ‘승수 앞에서는 조심해야겠네.’ 승수라고 해서 함부로 달의 반대편을 보일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의 웃음이 자자들 때 건민도 가볍게 입을 一자로 만들어보였다. 그러곤 잠시 우리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건민이와 도경, 재희는 학생회관 앞에 천막을 쳐놓고 신입생을 모집하는 동아리를 구경하러 갔고 승수는 3학년 학생회장 형의 호출을 받아 과방으로 이동했다. 저녁에 있을 신복학생 환영회가 매끄럽게 진행되도록 1학년 인솔을 잘 맡으라는 시시콜콜한 설명을 한답시고 소환하고서는 실제로는 여자 선배들의 술수에 학생회장이라는 임직을 남용한 것이다. 특히 학생회장과 같은 학번에 4학년 오남희라는 여 선배가 승수를 처음 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군침을 흘리며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자기 정도면 그만한 남학생을 사귈 급이 된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그녀의 동기나 후배들도 앞에서는 ‘남희 여신’이라고 추키며 잘 해보라고 응원해 마지않았다. 승수보다도 네 살이나 더 먹었지만 그가 나타난 이후로는 유독 빠른 생일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아마도 오남희는 언젠가 정말로 승수와 자기가 특별한 이성 관계로 발전하리라고 믿었던 것 같았다.

그녀의 인상은 이렇다. 부리부리하고 큰 눈에 끝이 위를 향해 쭉 찢어졌고 진한 쌍꺼풀과 유독 길고 숱 많은 속눈썹이 한눈에 봐도 미인이라기보다 매서운 쪽에 가깝다. 항간에 떠도는 말이 2학년 여름방학 동안 얼굴 공사를 새로 하고 오느라 가을 학기를 다른 학우들보다 늦게 시작했다고들 하는데 이미 그녀의 동기들이 거의 다 학교를 떠난 뒤라 사실 확인은 불가능하다. 사실은커녕 누구라도 함부로 그녀의 과거를 들춰내고 싶다면 남은 학기 내내 유령처럼 혼자 학교생활을 해낼 각오부터 다져야 할 것이다. 그래도 역시 서로서로 말만 안 할 뿐이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좁은 콧방울 사이에 오뚝하게 솟은 콧날을 가운데 두고 대칭에 가까운 얼굴과 솜뭉치를 넣은 것처럼 폭신해 보이는 도톰한 입술, 넓고 동그란 이마가 인멸할 수 없는 증거로써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남희의 매서운 인상과 다를 바 없이 매섭고 다중인격에 까다로운 성미는 겪어보지 않아도 알만하기에 ‘예쁘다’는 말 외에 그녀의 외모와 관련된 말이라면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만 한다. 그러기가 힘드니까 그냥 ‘남희 여신’이라 찬양하자는 불문율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 뜻 깊은 속을 알 리 없는 일명 ‘남희 여신’은 나르시시즘의 환각 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녀의 예쁜 여자만 지을 수 있는 눈웃음치기와 곤란한 질문에 ―대체로 상식과 지식을 요하는 질문― 노코멘트 하기, 시도 때도 없이 정색하기가 몸에 배어 자연스럽게 그런 식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천하를 통일한 황후의 위엄이 서린 것 같은 면모를 엿보게 된다. 예외가 있다면 승수 한 사람이었다. 승수는 남희에게 있어서 그저 예뻐하는 애완동물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 승수는 모든 사람이 동경하는 아이돌이었고 쉽게 가까이 지낼 수 없는 스타였다. 그런 승수를 어떻게든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남희는 한 가지 속담에 집착하는 중이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벌써 이런 적이 입학 전부터 자주 있어왔던 일이라서 승수는 전보다 더 사무적인 태도로 과방에 들렀다. 들어가자마자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희가 한쪽 구석에서 짐짓 모른 체하고 앉아있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승수는 몸을 돌려 가까이에 있는 학생회장에게 먼저 인사했다. 학생회장은 공부도 잘 하고 성실한 데 반해 맹한 데가 없잖아 있는 어딘가 어수룩한 사람이었다. 다만 목소리가 유달리 좋고 힘이 있어서 금방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도 했다. 학생회장은 승수가 제 후배인 것이 참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렇지 않아도 그를 보면 주눅이 들고 허리를 당당하게 펴질 못 했다. 때문에 승수를 만나면 인사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든가 등을 탁탁 쳐주면서 과장되게 윗사람 행세를 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승수의 얼굴이 조금 차가워보여서 학생회장은 자기도 모르게 승수와 똑같이 목례를 해주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남희와 과방에 있던 학생들이 다 같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괜히 승수에게 탓을 하려고 시도했지만 여전히 그는 아주 조금 웃는 얼굴로 자기 앞에 꼿꼿이 서있었다.

 

“난 교수님인 줄 알았잖아! 너 1학년 명단 가지고 있어?”

 

승수는 짧게 “예.”라고 대답했다. 이 땜에 학생회장은 괜한 오기가 발동되었다.

 

“그래? 꺼내봐.”

 

승수는 뒤로 메고 있던 가방의 한쪽 팔을 풀어 돌려 메고서 지퍼를 열어 붉은 서류철을 꺼내 학생회장에게 보여주었다.

 

“됐어. 있는지 확인만 한 거니까 다시 넣어놔.”

“왜 저래?”

 

구석에 앉아서 붙인 손톱을 만지작거리던 남희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 바람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있던 후배들이 몸을 움찔했다. 승수는 서류철을 다시 집어넣고 가방을 바로 멨다. 학생회장은 열없이 안경을 고쳐 쓰면서 말을 더듬었다.

 

“오늘 알지? 저녁에 환영회 있는 거. 오후에 1학년 전공 필수 있는 거 다 아니까 한 놈도 빠뜨리지 말고 데려와. 혹시 빠지는 사람 있으면 불이익 있다는 거 반드시 말해.”

 

이번에도 승수는 “예.” 라고만 대답했다. 남희는 승수가 곧 나가 버릴까봐 조바심이 났다. 그녀는 앞에 앉아있던 3학년 후배에게 눈치를 줬다. 슬기는 이 학과 3학년으로 단대 학생회 임원인 남학생이었다. 게다가 남희의 열렬한 추종자인 양 행세를 하면서 아래 학년을 전부 통솔하는 지휘권을 얻어낼 정도로 처세에 능했다. 따지고 보면 실세는 학생회장보다 슬기가 가졌다고 볼 수 있었다.

 

“야, 승수는 뭘 먹고 자란 거야, 대체? 우리하고는 품종 자체가 다르다, 야.”

 

슬기는 자연스럽게 승수의 이목을 끌었다. 승수가 웃어보이자 슬기는 얼른 기회를 잡았다.

 

“승수야 좀 앉았다 가. 아, 우리 지금 요 앞에 카페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 아직 시간 되잖아, 맞지?”

 

승수는 처음엔 거절할 생각이었다. 단번에 거절하지는 않겠지만 알아듣게 거절하고 문제 일으키지 않고 과방을 나오자는 게 순간적인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의 마음이 바뀌었다. 그렇지만 또 단번에 승낙하지는 않는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너무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게 시간을 끌었다. 남희만 혼자 애가 타 죽을 것 같았다. 승수가 꽤 귀여운 태도로 나이에 걸맞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 모습에 황홀해진 건 남녀를 불문하고 남희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학생회장과 몇몇은 과방에 남고 남희와 슬기, 승수는 학교 근처에 있는 커피 체인점으로 움직였다. 남희는 앉아서 내내 고민하던 것, 즉 함께 카페를 갈 때 승수 옆에 붙어서 갈지 아니면 슬기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서 갈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막상 길을 나섰을 때에는 행복한 고민이 말짱 쓸모가 없게 되었다. 학교 문턱을 넘어서기까지 새 학기를 맞이한 파릇파릇한 청춘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한 발자국도 승수의 곁에서 걷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승수는 오로지 슬기와만 붙어서 걸으며 남자들 간의 대화에 남희를 껴주지도 않았다. 물론 가끔씩 하이힐을 신고 힘겹게 걷는 남희를 돌아보며 기다려주기는 했지만 그것이 남희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겨우 도착한 카페 안에도 세 사람이 앉을 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님들이 바글바글했다. 키가 큰 승수가 겨우 구석에 한 자리 난 것을 보고 슬기가 재빠르게 자리를 맡아놓은 덕분에 남희는 잃었던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남희는 슬기를 향해 퍼부었다. 어쩜 매너가 꽝이라는 둥, 사람에 치여 잘 걷지도 못 하는데 지나가는 여대생들 치마 길이나 재고 있냐는 둥 가시 돋친 말투에 슬기는 쩔쩔 맸다. 그 사이 승수는 미리 알아놓은 메뉴대로 음료를 주문하고 있었기에 남희는 제 본색을 맘껏 드러낸 것이었다. 날이 아직 찼지만 승수는 걸어오는 동안 열이 좀 나서 얼음을 갈아 넣은 플랫치노를 마시기로 했다. 음료를 가지고 자리에 앉은 승수는 슬기와 남희 앞에 핫초코와 아메리카노를 얼른 내려놓고 플랫치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곧 이와 머리에서 깨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와 승수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남희는 얌전히 빨대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승수의 모습을 요목조목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다 승수가 갑자기 찬 것을 들이마신 후유증으로 괴로워하자 남희는 크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남희는 승수의 머리를 마사지해주고 싶다는 충동을 최대한 억누르며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너 진짜 매력 있다.”

 

웬만하면 승수에게는 칭찬을 해주지 않으려던 계획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지 아니, 괜찮은 이상으로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남희는 합리화하고 말았다. 아직 채 추위가 가시지도 않았는데 차가운 얼음 음료를 저렇게나 시원하게 들이켜는 남자가 또 있을까? 두개골이 빠개질 것 같은 아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흔하기는 할까? 오만상을 찌푸린 얼굴도 승수가 하면 환상적인 화보가 되었다.

남희는 그를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동안 학과의 전례를 보아온 대로 따를 것이었다. 후배로 들어온 남학생 중 가장 괜찮은 녀석은 언제나 선배 여학생들의 차지가 되곤 했는데 방법은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미끼를 던지고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과 같은 작업을 해놓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갓 대학교에 들어온 어린양들이란 참으로 세상물정 모르는 풋내기일 뿐이었다. 승수가 조금 남다르긴 하여도 적어도 6학기 이상 학점을 이수한 만큼 대학물 먹은 사람을 당해낼 리가 없다고 남희는 짐작했다. 때때로 승수에게 새내기다운 어리숙함을 발견할 때면 그녀는 남모를 희열과 기쁨을 느끼곤 했다. ‘바로 그거야!’라고 속으로 응원을 해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 승수의 선배 되는 학생들이 그의 실수를 보고 ‘천하의 김승수도!’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마치 남희 자기를 겨냥해서 해주는 말로 들리기도 했다. ‘물론 멋진 녀석이지만 그도 사람이고, 그만하면 네가 못 넘을 산도 아니거든.’ 남희의 귀에는 이렇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승수가 당황한 듯 웃으면서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누나?” 라고 되물었다. 그는 여전히 고통스러운지 양쪽 머리를 손으로 꽉 누르며 아픈 내색을 하고 있었다. 남희는 또 다시 엉뚱한 생각에 휘말렸다. 만약 그와 지금 사귀는 사이라면 남희는 그의 머리를 삐삐처럼 양 갈래로 땋아 묶어주고 싶을 거라고, 눈 깜빡할 사이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냐. 아직도 어린 내 나는 것 같다는 말이야. 풋풋해서 좋다구.”

 

슬기는 딴청 피우듯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그는 진작부터 이 자리에 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남희가 또 한 번 신호를 주면 제 갈 길을 가겠지만 너무 티 나게 자리를 떠서는 오히려 남희에게 점수를 잃게 될 것을 알았다. 개인적으로는 승수와의 친분을 다지고는 싶었지만 여기는 그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으니 가만히 상황을 지켜만 보았다. 그러다 만약을 대비해 다른 과의 학생회 임원 하나를 근처에 부르기로 했다. 친하게 지내는 녀석이고 가까운 원룸 촌에서 자취를 하고 있으니까 언제든 부르기만 하면 나올 놈이었다. 그저 태평하게 앉아서 눈치껏 남희의 비위에 맞게 굴어주다가 때 되면 박차고 일어나기만 하면 되었다.

예상한 대로 상황은 천연덕스럽게 흘러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끔씩 남희는 승수의 어깨나 손을 만지기도 했다. 남희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 대신 슬기가 이런 추임새를 넣었다.

 

“어! 그거 오남희도 그래. 맞지?”

 

아니면,

 

“비슷하다, 둘이 비슷해. 오남희, 너도 그런다지 않았어?”

 

슬기가 그럴 때마다 남희는 어깨를 으쓱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승수와의 공통점을 맞춰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승수의 남희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았다. 승수의 눈에서 어쩐지 남희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그건 남희만이 아니라 슬기도 알아챘다. 공모자들의 얼굴에서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하기야 승수라도 승수 같은 사람을 어디서라도 본 적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제껏 만나본 적 없는, 알고 보면 상당히 괜찮은 여자가 자기 앞에 앉아있는 것은 아닐지 기대에 찬 눈빛을 남희에게 쏘아 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희는 그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은근한 눈으로 승수를 바라보았다. 슬기는 이제 슬슬 자기가 빠질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마침 슬기의 휴대폰에서 흥을 돋우는 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자기가 부른 친구의 전화를 받으면서도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어, 나 밖이지. 어디라고? 야, 그럼 얼마만인데 봐야지! 알았어. 좀만 기다려. 어.”

 

슬기가 전화를 끊자 남희가 말했다.

 

“누구야? 가야돼?”

 

슬기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어. 명수. 남희 너도 알지? 안 그래도 상의할 것도 있었는데 딱 연락이 와서……. 승수야, 형 먼저 가볼게. 둘이 놀아. 괜찮지?”

“에이! 배신자! 승수가 나 아직 불편해 하는 거 모르냐?”

“응? 너를? 승수야, 그래? 야, 네가 남희를 몰라서 그래. 남희, 내가 아는 여자 중에 제일 편하고…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진짜야. 야, 한 번만 봐줘라. 나 진짜 가야겠다. 갈게! 쏘리!”

“안녕히 가세요.”

“그래, 가라.”

 

남희는 엉성하게 말해놓고 후다닥 뛰쳐나가는 슬기와 서로 눈짓으로 뭔가를 보내면서 키득거렸다.

 

“누나, 왜 웃어요?”

“응? 아무것도.”

 

슬기가 자리를 떠날 즈음에는 북적거리던 카페가 조금은 한적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까 어수선했던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승수의 몸에 손을 대기까지도 하며 과감하게 굴던 남희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승수와 단둘이 남겨진 남희는 약간 긴장이 되었다.

컬이 들어간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남희는 아까의 분위기를 도로 가져오려고 애썼다. 승수는 슬기가 간 이후로 부쩍 말이 없어졌다. 남희를 눈여겨보는 것처럼 행동하던 모습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와 슬기가 섣불리 착각을 했던 걸까? 곰곰이 이어갈 대화거리를 찾으며 남희는 연신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승수의 어깨를 가볍게 치려고 했다. 그때였다. 승수는 부드럽게 제 몸을 등받이에 기대며 남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했다. 남희의 손이 어중간한 위치에서 공중에 붕 떠버렸다. 천천히 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지만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승수는 못 본 척하지도 않고 그냥 남희의 행동을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그의 앞에 남은 플랫치노를 한 모금 마시면서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남희를 바라보았다. 남희는 “아, 맞다. 너 피아노 클래식 연주 듣는 거 좋아한다고 했지? 다음 달에 여기 문화회관에서 연주회 한다는데…….”라고 서둘러 공백을 메웠다. 그러나 승수는 뒤로 물러나기는커녕 두 발 앞으로 성큼 내딛으며 “네, 제가 치거나 집에서 조용히 오디오로 들어요. 연주회에 가면 어린아이들이 많아서 몰입이 안 되잖아요.”라고 대꾸했다. “참…, 그렇지……?” 남희는 멍하니 맞장구쳤다. “아, 너도 애들 별로 안 좋아하는 구나.” 또 그렇게 한 마디 덧붙였다. 승수가 그런 남희를 다시 표정 없는 얼굴로 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제 말이 그렇게 들렸어요?” 남희는 어리둥절했다. 이제 보니 승수는 표정이 없다기보다 약간 괄시하듯 남희를 보고 있었다. 남희의 성격 상 그런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단번에 울화가 치밀고 만다. 그러나 승수에게는 한 번 더 확인을 해볼 기회를 주기로 했다. 남희는 그녀의 손을 승수의 허벅지에 살짝 대며 ‘그렇잖아. 내가 오해한 거야?’하고 말하려고 했다. 남희가 재빠르게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승수는 자연스럽게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았다. 그러는 바람에 남희의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 쏠려버렸다. 그녀의 목구멍에서 바닥난 자존심이 뻗쳐오르는 화를 억누르지 못 해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차였다. 승수가 재빨리 남희의 몸을 일으켰다.

 

“누나, 괜찮으세요?”

 

승수가 남희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똑바로 앉혀주며 걱정스런 얼굴을 남희의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향긋한 냄새가 남희를 순식간에 진정시켰다. 이미 승수는 제자리로 돌아가 앉아있었지만 남희의 눈에는 승수의 동그랗고 맑은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승수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만이 간절했다. 그녀는 조금도 승수를 놓치고 싶지 않아져버렸다. 그는 너무나 완벽했다. 남다른 풍모와 기질, 풍기는 분위기, 그리고 가까이에서 맡은 따뜻하고 포근한 그의 체취가 그녀의 것이 되지 않는다면 만약이라도 다른 누가 갖게 된다면 그녀는 질투로 무슨 짓이든 저질러버릴 것 같았다.

환각에 빠진 것처럼 멍하니 앉아 금방 맡았던 승수의 냄새를 다시 기억해내려고 더듬어보다가 남희는 서서히 깨어났다. 테이블에는 처음 보는 휴대폰이 놓여있었다. 남희는 승수의 휴대폰을 처음 보는 것 같아 낯설었다.

 

“이거 네 거야?”

 

남희가 승수에게 물었다. 승수가 플랫치노를 끝까지 마시고 잔을 탁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휴대폰 케이스는 메탈 재질로 되어있어 어딘가 정돈되고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승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래, 갔다 와.”

 

남희가 힘없이 대답했다. 승수가 자리를 떠나고 남희는 혼자 앉아서 헝클어진 생각 대신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리했다. 혹시나 어디서든 연락이 왔을까 싶어 휴대폰을 꺼내보았으나 화면에는 외국 여자 모델이 짧은 핫팬츠만 입고 팔로 풍만한 가슴을 가린 채 길게 쭉 뻗은 다리를 자랑하는 익숙한 사진이 보일 뿐이었다. 본인이 지정해놓은 사진 속 모델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자기와 그녀가 외모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날지 따져보고 있었다. 그러다 남희는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승수의 휴대폰이 궁금해졌다. 그의 휴대폰 화면은 어떻게 꾸며져 있을까? 남희의 상상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물건에까지 함부로 손을 대는 식으로 이미지를 깎아먹고 싶지 않았다. 언제 다시 승수가 자리로 돌아올지 몰랐다. 그냥 물끄러미 그의 화면이 저절로 켜지기라도 할 것처럼 내려다보았다. 그때 승수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바라던 대로 저절로 화면이 켜졌다. 남희는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더 바싹 다가갔다. 진동이 계속해서 울리고 화면에는 ‘전화가 왔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전화를 한 사람의 이름과 그녀의 사진이 있었다. 흐린 사진이었지만 용모가 꽤 단아하고 단정한 여자의 실루엣이 바로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 옆에는 하트 기호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남희는 조금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으로 간신히 입을 막고 사진 속 여자를 더 자세히 보았다. 그때 휴대폰 화면에 승수의 얼굴이 반사되어 나타나 전화기를 낚아채갔다. 휑하니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는 승수를 내다보며 남희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승수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도보 바깥쪽 가로수 옆에서 통화를 하는 동안 남희는 한층 더 침울해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난히 큰딸인 남희를 예뻐했다. 언제나 그녀를 지지했고 원하는 것은 전부 다 들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딸 사랑이 좀 지나쳤던지 그녀의 어머니는 반대로 남희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반대를 했고 미워했다. 남희가 학교를 다니던 도중 극심한 외모 콤플렉스를 받아 우울증에 시달리던 것도 잠시, 부모님과는 의논도 없이 성형외과에 쫓아가 견적을 내고 와서는 그 비용을 아버지에게 지불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을 때 아버지는 눈물까지 흘리며 조금도 마다않고 그녀의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었다. 천만 원이 웃도는 돈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할부로 나가는 것을 그녀의 어머니가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워낙 절연한 듯 지내는 모녀지간인지라 남희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자기 방 한구석에서 지내는 줄도 몰랐다가 매달 청구서를 꼼꼼히 챙겨보던 습관 덕에 남희의 어머니는 탕아에 대한 더없는 미움이 훨씬 깊어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두 부녀에게 별거를 선언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재가 탐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가정의 훼손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편을 들기로 하고 남희를 집 밖으로 내보냈다. 다만 비상금으로 모아뒀던 돈만큼은 전부 쥐어주고 살아갈 집과 여러 가재도구는 손수 마련하여 보냄으로써 남희에 대한 부성애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희의 어머니만 남희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희 역시 자기를 미워하는 어머니가 곱게 보인 적 없었는데 이 일을 겪고 나서는 완전히 그녀의 마음도 돌아섰다. 그러나 남희는 모르고 있었다. 그 속에서는 어머니에게서 받고 싶은 애정이 매일 한 뼘씩 결핍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핍이 무한한 것이었음을 남희는 깨달을 수 없었다. 따뜻한 어머니의 손길 한 번 받아보지 못 하고 자란 남희가 그것을 알 턱이야 없었다. 남들의 눈에는 다 보이는 것이 거울 없이는 자기 얼굴을 보지 못 하는 것처럼 남희는 제 커다란 약점이 보이지 않아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었다.

남희는 이제와 승수와 자기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단아한 이미지의 사진 속 그녀가 훨씬 승수와 잘 어울렸다. 슬기가 부추기며 해주던 말들, 그 많고 많은 공통점들은 사실 남희와 승수가 아니어도 누구나 공감할 만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머리를 쓸던 짓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 생각만 하여도 금방 알 수 있는 것을 그녀는 너무 멀리 돌아와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승수가 자리로 돌아왔다. 남희의 뒤로 걸어오면서 불어온 바람결에 승수 특유의 냄새가 묻어서 다시 남희의 코를 건드렸다. 남희는 마지막 보루인 냥 신중하게 승수에게 물었다.

 

“예쁘더라. 여자 친구야?”

 

승수는 알 듯 모를 듯 미소만 지어보였다. 휴대폰을 켜 시계를 들여다보는 행동이 곧 자리를 떠야함을 암시하고 있기도 했다. 남희는 한편으로 소득이 많았던 것도 같은 오늘의 데이트가 어째서 이런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 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눈빛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남희가 전부 착각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승수가 그녀를 착각하게 만든 주범이었다. 왜냐하면 슬기도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되어가는 것을 목격하고야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남희는 슬슬 부아가 치미는 것을 아닌 척하며 승수에게 바짝 다가가 말했다.

 

“나 사실 고민 있어. 좀 들어줘.”

 

승수가 고개를 쳐들고 빼꼼 남희를 쳐다보았다. 남희가 입술을 축이며 말을 꺼내려하는데 승수가 말을 가로챘다.

 

“들어드리고 싶은데 수업시간 다 됐네요. 저 수업 있는 거 아시죠?”

 

승수는 그렇게 떠나버렸다. 남희는 남아있는 모든 오기를 다 부리고서 자리를 떠날 셈으로 하늘빛이 짙어져가는 것을 노려보았다. 바깥은 바람이 좀 세게 부는지 사람들이 코트 깃과 목도리 속에 얼굴을 게처럼 감추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갔다. 해는 돌연 언제 져버린 건지 하얀 달이 낮은 건물 위에 올라앉아서 실눈을 뜨고 남희를 내려다보았다. 남희는 차갑게 식은 잔에서 손을 떼고 휴대폰 화면을 켜보았다. 슬기에게서 문자가 몇 개 와있었다. 자기에게 한 턱 쏘라는 둥, 어리석은 점쟁이 같이 남희의 속을 뜨겁게 태우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뭐라고 쏘아대고 싶기는 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무기력해져있었다. 하나하나 꿰어 맞춰서 잘 생각해보니 이 모든 일이 슬기로 인해 벌어진 것 같았다. 당장 내일 있을 수업에서 슬기를 만나기만 하면……. 비로소 남희는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고 일어났다. 그녀가 모든 책임전가를 슬기에게 하고 나서야 기분이 풀렸다는 것은 깨닫지 못 했다. 새장에서 풀려난 새처럼 남희는 코트자락을 펄럭이며 카페를 벗어나 거리로 나왔다. 찬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쪼아댔다. 남희가 만약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승수가 벌써 하루 만에 몇 사람이나 특별한 하루를 보내게 해주었는지를 알았을 테지만, 그들은 모두 각자의 이야기만을 떠안고 차가운 바람에 맞부딪히며 집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카페 밖으로 나간 승수는 얼마정도 더 걷다가 휴대폰을 꺼내어 방금 통화했던 수신번호의 이름을 수정했다. 덧붙인 기호 하나를 도로 없애면서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웃음이 비죽 새어나왔다. 건민에게서 강의실에 먼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돌아가는 길 내내 그는 남희를 생각했다. 남희의 웃는 얼굴, 인상 쓴 얼굴, 표독스럽게 슬기를 노려보던 얼굴, 날카로우면서도 동글동글한 게 그녀의 모습이었다.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러니까 그의 여자 동기들이 말하는 것처럼 꼭 그런 사람은 아닐 거라는 거였다. ‘남자들이 모르는 여자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 말도 모르진 않지만 ‘여자들이 모르는 여자의 세계’를 남자들이 갖고 있다는 것을 아직 그의 앳된 여자 동기들은 알지 못 했다. 오히려 남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 하는 사람은 그녀 주변에서 아부를 떠는 사람 중에 많이 있었다. 승수는 남희가 싫지 않았다. 그녀처럼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비를 하지 않고 닥쳐오는 대로 금방금방 마음을 바꾸는 즉흥적이면서도 순수한 사람은 늘 주변에서 들리지 않는 비난의 화살의 과녁이 되고는 했다. 하지만 승수는 그녀가 아주 마음에 들었던 것도 아니다. 그녀는 돌진하는 황소처럼 과정도 없이 뿔을 냅다 박고 보자는 심보였다. 사람을 가려 사귀는 편이 아닌 승수마저 남희에 대해서는 철저한 경계 벽을 세워두게 만드는 저돌적인 여자였다. 그는 이 재미난 상황과 재밌는 사람을 골똘히 생각하며 천천히 강의실에 도착했다.

강의실에 승수가 들어서자 그 안에 있던 학생들의 이목이 모두 쏠렸다. 도경이가 승수를 불러 맡아놓은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는 긴 다리로 단 몇 걸음 만에 맡아준 자리에 앉았다. 옆 자리에 앉은 재희에게서 담배 냄새가 풍겼다.

 

“껌 씹을 사람?”

 

승수가 말하자 재희가 냉큼 손을 들었다. 그에게 껌을 하나 주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어디 가입했어?”

 

건민은 고개를 저으며 승수에게 되물었다.

 

“넌 어디 갔다 와?”

 

건민 무리가 과방에 들러 승수를 찾았던 모양이다. 승수는 남희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슬기 형이 놀자 해서.”

“아.”

 

건민이 강의실 뒤편에 걸어둔 시계를 한 번 보고 강의실을 휘 둘러보며 대강 대꾸했다. 강의시간이 2분 정도 지났는데 강사가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지각이야?”

 

도경이가 한 마디하고 5분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강사가 오지 않고 있었다. 웅성거리며 떠들던 소리가 한층 커져 있고 지루해하는 친구들이 승수를 보며 무언의 눈치를 주었다.

 

“내가 과사무실 다녀올게.”

 

과사무실에 다녀온 승수가 강의실 문을 급하게 열며 강단 위로 올라섰다. 승수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이 ‘설마…….’하는 모양으로 변했다.

 

“교수님이 오시다가 접촉사고가 나셔서 오늘 부득이하게 휴강을 하시겠대. 첫날부터 휴강하셔서 미안하다고 사과 꼭 전해 달라 하셨어. 시간이 좀 애매하게 남기는 했는데 학회장 형이 좀 기다렸다가 바로 환영회 하러 내려오라고 하셨으니까 다들 여기 있어야겠어.”

 

승수가 강단에서 내려오자 처음 휴강을 맞은 학생들은 어리둥절하여 고등학생 때처럼 자습이라도 하고 있어야 하나 해서 책을 뒤져보거나 엎드려 잠을 청하기도 했다. 승수는 곧 선배의 연락을 받고 먼저 소모임실로 내려갔고 남은 학생들은 화장실을 들르거나 휴게실에 가서 음료를 마시러 갔다. 재희는 도경이와 건민이를 꼬셔서 담배를 태우러 3층 테라스로 데려갔다. 건민이는 강의실을 나갈 때에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그가 찾는 하얀 코트를 입은 여학생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강의시간은 20분이나 훌쩍 지나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여학생을 신경 쓰지 않았다. 건민은 그래도 수업이 휴강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강의실을 나갔다. 어느덧 늦은 오후, 어둑해진 복도에는 세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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