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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대하여

가난과 위선

가난이란 얼음이 녹기 시작한 호숫가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가는 모습, 그 안에 있다. 사방 어디로 발을 내딛어도 쩍쩍 갈라지며 금방이라도 첨벙 물속으로 곤두박질치게 되는 그림이 그려진다. 가난이 그렇게나 두려운 일이냐 하며 묻는다면, 살얼음판 위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본 적 없는 사람들의 멋모르는 지껄임이다. 가난이 진짜 두려운 이유는, 그 허허벌판의 추위와 공포를 홀로 맞는 고독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 보면 유난히 헤진 옷과 초라한 행색을 하고 다니면서 가난을 티내는 친구가 한 반에 꼭 한 둘씩 있었다. 얼굴도 푸석하고 머리도 윤기 없이 검기만 했다. 그 뿐이면 다행인데, 더러는 눈치도 없이 그저 비굴하게만 굴면 자기 처지를 더 잘 이해해주리라 여기며 친구를 사귀려는 애들도 간혹 있다. 그러다 하는 수 없이 동정에 이끌려 친구가 되고 보면 예의 그 눈치 없음이 어렵게 쌓은 관계를 허물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애들은 뭇 또래들의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을 피할 길이 없었다. 반드시 공간의 변두리로 쫓겨나고말고 말조차 함부로 걸지 못 하는 수준으로 내려가게 된다. 운이 좋으면 동정심이 지극한 친구의 보살핌 속에서 동등하지는 않지만 근근이 버티고 살 정도의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에도 이런 전제는 여지가 없었다. 같은 반에는 행색이 초라하여 소문으로는 부모님한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지낸다는 여자아이가 한 명 있었다. 그리고 한 편에는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고 선생님께도 좋은 아이로 낙인이 찍힌 그런 여자아이도, 서로 특별한 연관성이 없는 두 아이가 한 반에 함께 했다.

고아원을 다니는 여자애의 짧은 머리카락과 봄, 가을, 겨울이면 단벌신사마냥 늘 입고 다니던 품이 큰 점퍼는 그 애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하도 그 모습 그대로라서 멀리서도 그 애가 힘없이 걸어 다니는 모양이 금방 눈에 띄었다. 그 애는 꼭 그렇게 자기의 처지와 가난한 상황을 티내야만 했던 건지, 감춰지지가 않는 건지, 어떻게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불쌍한 얼굴을 하고 다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를 누리면 사람은 그만큼 더 여유가 있어지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불쌍한 꼴을 하고 다녀도 그만큼 더 거리를 두게 되는 그런 아이에게 인기 많은 보라가 다가가 말을 걸었다. 가난뱅이 친구의 얼굴이 한 번도 본 적 없던 미소를 띠며 활짝 피어났다.

두 사람은 그 이후로도 한 무리 안에 섞여서 얼굴을 맞대고 앉아 쎄쎄쎄를 하거나 실뜨기 같은 놀이로 관계를 다져갔다. 그러나 한 번도 두 사람만 따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보라는 항상 무리와 함께 어울리다가 그 애가 혼자 있는 꼴을 보면 얼른 쫓아가 나무라듯이 말을 걸며 뒤에 선 친구들도 자기를 도와 이 애의 재활에 동참하도록 유도했다. 남들만큼 활달하게 웃고 말하고 뛸 수 있는 그런 재활을 말이다. 차차 보라와 가난한 친구는 서로 꽤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사이가 좋아졌다.

오히려 주변에서 그 둘 사이의 상황을 구경하던 내게는 알 수 없는 시샘이 피어올랐다. 가난해서 늘 주눅이 들어있던 그 애의 행동은 근 몇 달 만에 확연히 달라졌다. 목소리도 훨씬 커졌고 보라에게도 대등한 한 사람으로서 말을 걸 줄 알게 되었다.

무리를 지어 노는 데 취미가 없는 나로선 배알이 꼴리는 상황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내 가난을 이용해서 친구를 사귀려고 시도해본 적이 없었다. 가난 때문에 구태여 주눅이 들고 헐벗은 옷가지가 창피해서 몸을 수그리고 설설 기며 눈치를 보는 재주는 여태껏 가져본 적이 없었단 말이다. 당연히 인기가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구차한 갈망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 내 존재를 부득이하게 수면 위로 들어 올려줘야 나타나는 그런 존재이고 싶지 않았다. 혼자라 해도 나는 그저 나 자신으로 있고 싶었다.

왜인지 보라에게는 안타까움이 들고, 가난뱅이에게는 가득 적개심이 생겨났다. 그 둘은 애초부터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보라의 영웅 심리나 가난뱅이 친구의 피해의식이나 둘 다 도진개진인 것을 두 사람 모두 두 눈을 잃은 장님처럼 보지 못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너무 선명해서 날이 선 것 같은 눈으로 날카롭게 그 인과관계를 짚어보았다.

가난한 친구는 알 수 없는 적개심을 보이는 나를 피해 다녔다. 그럴수록 나는 그 친구의 숨은 의도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확신했다. 시간이 지나 모두 다른 반으로 학년이 올라가 뿔뿔이 흩어진 뒤에야 쓸 데도 없는 추측과 비정한 단정은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그 둘 사이에는 그리 찐득한 뭔가가 있는 게 아니었다. 대개의 영웅심리가 그렇듯 포장만 잘하면 뛰어나게 훌륭한 사람으로 명성이 자자하게 되고, 피해의식은 그 나름대로 치유가 된 듯 하다가도 촉매제가 없이는 도루묵이 되는 게 자연의 이치였다. 그 아이의 낡은 겉옷이 새 겉옷으로 바뀐다고 해서, 한 푼의 가치도 없는 먼지가 예쁜 포장지에 싸여있다고 해서 완전히 새롭게 거듭날 수는 없었다.

나의 가난이나 그 아이의 가난이나 동질의 것, 마치 불치병과도 같은 비참한 처지였지만 아주 같지만은 않았다. 가난을 빌미로 구걸하는 법을 한 번 배운 그 아이와 나는 시작부터 달랐다. 친구는 돈으로도 살 수 없지만 가난으로도 구걸할 수 없는 법이었다.

가난이 때론 고독과 절망의 살얼음판 같을지라도 어디로 한 걸음을 내딛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전환점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나는 가난을 티내는 그 애와 전혀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병처럼 옮을 것 같은 그 구질구질함에 넌더리가 났다. 아무 가진 것이 없어도 불쌍해 보이는 모습으로 원조를 바라는 눈길을 길거리에 뿌린다니, 그건 위선이었다. 만약 누구와도 동등한 관계로 지내고 싶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 영웅 심리에 자기 도취된 아이의 눈을 현혹시켜서는 안 된다. 나는 단지 취향과 맞지 않아 인기가 많던 적던 보라와 친구가 되지 않았지만 보라와 한 무리로 다니던 아이들은 자기 줏대도 없이 보라의 주문대로 가난한 아이와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한 뭉텅이의 위선이었다. 위선의 도가니였다. 왠지 저 아이들의 위선을 선생님께 고발하고 싶기까지 했다.

“선생님, 그 애들은 친구가 아니에요. 다들 친구인 척 해요. 그 중에 한 아이는 동정심을 강요하고 한 아이는 자기와 같이 자선하도록 강요해요. 그 애들은 내 친구도 아니에요. 아무도 나에게 친구가 되라고 강요하지 말아야 하잖아요? 그건 실상 친구라고 부를 수도 없는 거죠?”

내 발언은 적개심으로 대신 표출되었고, 적개심은 따가운 눈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럴지라도 그 애를 동정할 자격은 나한테 없었다. 나에게는 가족이 있지만 그 애는 가족 대신 고아원에서 피 안 섞인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 애를 동정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 애가 기를 펴고 어깨를 당당하게 들고 다른 친구들처럼 자기만의 공간에서 독립적으로, 내성적이든 외향적이든 그 자체로 존재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보라가 자신감을 키워준 이후로 자기의 감정도 점차로 표출하던 그 애에게서 웃을 때 귀엽게 눈꼬리가 말린다든가 제법 운동신경이 있다든가 하는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그 애는 성격도 꽤 귀염성이 있고 친구들과 어울릴 재간이 스스로에게도 있었다. 그 애에 대한 호감과 적개심은 종이 한 장의 차이였을 뿐이었다.

그 애는 내 또 다른 분신이거나 거울과 같았다. 그 아이를 보면 자연스럽게 감정이 이입되었다. 그렇게 굴복하지 말라고 일러주고 싶었다. 가난에 눌리지 말라고, 자기혐오에 휩싸여 정체 모를 피해의식을 갖지 말라고, 어차피 그런 누추한 감정을 가져봐야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이제라도 할 수만 있다면 말해주고 싶었다. 나를 경멸의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날리던 그 아이에게 가난보다 그 위선이 먼저 널 집어삼킬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싶었다. 혹시 한 대 맞게 되더라도 내 뺨은 위선이 스치고 지나간 흔적으로 빨갛게 부어올라 더 선명한 경계를 주게 될지 몰랐다. 그대로 무너지지만 말고 그 다음 걸음에서는 현명한 선택이 나오길 바랐다. 거울 속에 선 그 애에게 행운이 따른다면 바로 그런 선택이야말로 절묘한 행운과 진배없으리라.

줄곧 가난했지만, 또한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한 조각 전리품과도 같은, 푸석푸석한 기억이야말로 잠시나마 이 고독을 잊게 해준다. 여전히 피해의식을 뒤덮을 촉매제가 필요한 우울한 청춘이다.

그 애의 피해의식과 위선은 다만 가난의 말로를 보고자 애쓰다 생긴 흉터인가도 싶다. 만약 그랬다면 그 애의 몸부림이나 나나 다를 것이 없으니, 이제 무슨 말로 나를 위로하고 합리화해야 좋을까?

가난, 그 불치병의 역사, 가난의 말로, 그 끝을 보기 위해 이 인생이 덧없이도 흘러감을 왜 이리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이야말로, 그토록 치를 떨던 위선, 위선의 도가니 아닌가.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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