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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링크를 풀기 위한 우류신화 연구서(3.2.1)

다시 써야 할 미완성 장편소설

 

 

 

 

 

3.2.1

 

시간의 틈

 

 

 

 

 

별로 필요 없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를 이번 화는,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로서 이 자리를 빌리게 되었다. 누구나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있다시피 왜 이들의 뒷이야기가 거론되지 않고 지나쳐도 무방하다고 여길 수 있겠는가? 물론 각양각색의 사연들이 결코 지지부진하게 사람들의 흥미를 저리로 밀어내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야기 자체에만 현혹되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 하고 헤매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불평은 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는 미래의 열쇠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을 겪기도 한다. 또는 그렇지 않기도 하고, 아니면 자신의 인생이 어떤 사건을 겪은 뒤로 완전히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단순히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우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만난 유현이로 인해 조금이나마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고 여기고 있다. 비록 유현이는 그저 자신은 한 사람일 뿐이고, 너무 큰 기대를 걸어 자기에게 부담 주지 않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말이다.

 

“난 그저 불쌍해서 조금이라도 위로가 돼주려고 했던 거야.”

 

이해한다는 듯 유현의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친하게 지내던 다정이가 유현이의 갈피를 못 잡고 휘둘리는 꼴을 보며 견디질 못해했다. 이제라도 딱 잘라 거절하는 버릇을 들여서 우리와의 관계를 되도록 빨리 정리하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 와주길 바라고 있었다. 작년에 이어 그 해에도 같은 반이 된 유현이와 다정이는 죽이 잘 맞는 것은 물론 서로의 상황이나 이해가 무척 비슷해서 눈치 빠르게 챙겨주며 급속도로 친해진 데다 이제는 누가 봐도 한 쌍이나 다름없는 ‘베스트 프렌드’였던 것이다. 그 사이에 갑자기 끼어들어 둘 사이를 갈라놓은 사람이 바로 우리였다. 난데없이 나타나서 유현이를 독점하려하더니 갈수록 대놓고 눈에 불을 켜고 제 옆에만 두려는 꼴이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다정이를 비롯한 유현이의 친구들은 물처럼 순하고 독하게 굴 줄 모르는 유현이가 답답하기도 하면서 감히 제 친구를 부려먹는 우리의 버르장머리를 어떻게 고쳐놓을까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소문으로 들어서 우리가 현재 부모형제도 없는 생고아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다가 워낙 분위기가 어두침침하고 내성적이라 친구도 하나 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유독 사려 깊고 마음씨가 좋았던 유현이와 한 반이 되어 그녀의 눈에 띄게 된 것이 문제의 발단이라면 발단이었다. 일부러 우리에게 다가가 친한 척 말 거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우리는 단순한 고아가 아니었다. 그녀의 품성은 별로 좋지가 않았다. 어쩌다 한 마디 내뱉는 말도 독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언제나 사람들을 노려보았고 욕심은 마천루보다 높이 뻗어있었다. 혹여 누가 실수로 치기라도 하면 우리는 재난이라도 겪은 사람처럼 발광을 하곤 해서 누구 하나 그녀의 털끝이라도 건드리려는 시도는 물론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찌나 경쟁심이 투철한지 누구에게 지기를 극도로 혐오하여 학업성적은 상당히 우수했다. 그 때문에 가끔 호기심을 동반한 관심으로 은근슬쩍 다가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들 상처만 입고 떨어져나가곤 했다.

유현이는 성품이 온순한 것은 물론이고 매사 꼼꼼한 면이 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가려 사귀지 않았지만 자기의 약점을 쉽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였는지 유현이는 우리를 보고 이상한 동질감을 느꼈다. 우리가 마음을 열지 않는 데에는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지 진짜로 믿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얕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어느 정도 분석도 해보았다. 그렇다면 본인은 다른 사람보다 우리의 마음을 여는 데 조금은 유리한 위치라고까지 여기기도 했다. 유현이는 당시 그 반의 반장이었고, 반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운 좋게 유현이는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름순으로 주번을 맡다보니 성이 ‘송’씨인 유현이와 우리가 나란히 한 조로 엮이게 되었다. 두 사람은 주어진 교실 업무를 나눠서 해야만 했다. 우리는 겨우 한 주 봉사하는 것인데도 사람과 짝지어진 자체로 벌써 지긋지긋하게 여겨졌다. 분필과 유성매직을 때때로 갈아줘야 하고 하필 교실이 1층이라 화단에 가끔씩 물을 주기도 해야 했다.

 

“우리야, 선생님이 부르셨어. 교무실 가야해.”

 

유현이가 교실 앞문에서 앞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를 큰소리로 불러냈다. 우리는 입도 벙끗하지 않고 말없이 유현이의 뒤를 따라 교무실에 들어갔다.

 

“어, 유현이하고 우리가 이번 주 주번이지? 이거 이제 게시판에 붙일 때가 되었어. 둘이 상의해서 잘 보이게 붙여줘.”

 

담임선생님은 유현이의 손에 접혀있는 커다란 벽보 세 장을 건네주었다.

유현이가 그것을 교실로 가져가기도 전에 복도에서 펴보았더니 각 대학과 학과의 성적 커트라인을 보여주는 표가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그것을 펴보며 계단에 걸터앉아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와! 이 학교 생각보다 훨씬 높네! 어쩐지 그 언니 재수하더라니. 근데 여기는 여기보다 낮구나. 의외다. 어? 우리야, 여기 봐봐. 봐, 내가 가고 싶은 데가 여기야. 바로 여기.”

 

유현이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작게 써져있는 글자를 가리켰다. 우리는 관심 없는 태도로 뒷짐 지고 한 걸음 떨어져서 서있었다. 유현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벽보 구경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우리가 짜증난다는 말투로 유현이를 말렸다.

 

“그만 보고 빨리 가서 붙여.”

“잠깐 가만 있어봐. 휴대폰으로 찍어둬야지. 프로필 사진으로 지정해놓고 매일매일 볼 거야. 내년에 반드시 이 학교 학생이 되어 있을 수 있도록 빌어야지.”

 

유현이는 교복 상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초록색으로 흐리게 인쇄된 학교의 이름을 사진 찍었다. 우리는 더욱 짜증이 나고 괜히 조바심이 났다. 우리가 막 큰소리로 쏘아대기 직전에 유현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어때? 우리야, 넌 어디 가고 싶어? 이 중에 있니?”

“네가 무슨 상관이야.”

 

우리는 낮은 어조로 경고하듯 쏘아댔다. 유현이는 입을 부루퉁히 내밀고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언제나 저런 모습으로 서 있곤 해서 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그렇게 보였다. 유현이는 진심으로 우리가 안타까웠다.

 

“너 대신 내가 소원 빌어주고 싶어서 그래. 네가 꼭 그 학교에 갔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유현이가 눈물이라도 한 방울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로 우리에게 말을 건넸을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크게 흔들려버렸다. 그녀는 동요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평소처럼 심하게 화를 내었다.

 

“헛소리하지 마! 내가 어딜 가든 알려고 하지 마. 그건 내 일이야. 너나 잘 해!”

 

우리는 유현이를 복도에 놔두고 쿵쿵 발소리를 크게 내며 교실로 돌아가 버렸다. 혼자 남은 유현이는 물론 우리에게 뺨이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기분이 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발악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눈뜨고 차마 못 볼 정도로 가엽기만 했다. 우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면서 어떻게든 제 마음을 감추고 엿보지 못 하게 하느라 애를 쓰는지 유현이는 알 수가 있었다.

유현이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교실로 돌아가 혼자서 끙끙대며 벽보를 붙였다. 다른 친구들이 보고서 유현이를 거들어주었지만 우리는 모른 척 제자리에 앉아서 문제지를 풀기만 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미묘하게 어색한 분위기를 내면서 함께 맡은 일을 해야 했다. 화단에 물을 주기 위해 유현이가 물을 뜨러 간 사이, 우리는 멍청히 화단 주변을 맴돌며 유현이를 기다려야 했다. 유현이는 물뿌리개를 우리에게 건네며 “이번엔 네 차례!”하고 명랑하게 말을 걸었다.

밤이 깊어 교실을 채우고 있던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수선하게 가방을 챙기며 떠들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걸어서 근방에 있는 고시원을 향해 가고 있었고, 유현이는 버스를 타려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함께 나가는 길이었다. 가로등불이 비추는 정문 앞길을 내려가던 유현이의 눈에 시끌시끌한 무리 가운데에서 독주하듯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친구들을 앞질러가는 우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유현이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친구들을 뒤에 두고 우리를 향해 마구 뛰어갔다.

 

“우리야!”

 

특유의 맑은 음성으로 유현이는 우리를 뒤에서 덮치더니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늦은 밤, 여기저기서 종알대는 무리 가운데 주황색으로 물들은 길 위를 홀로 걷던 우리의 마음은 어딘가 새카만 묵보다 더 물렁하게 물러져있었다. 우리로선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친구와 함께 팔짱을 끼고 하교 길을 함께 걷는다는 것이 이처럼 기분 좋은 일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 했었다. 유현이의 팔은 교복을 입고 있어도 부드럽게 느껴졌다. 또 좋은 냄새도 났다.

 

“너 저쪽 고시원 다니지? 사실 나도 요새 고시원 알아보고 있었는데……. 거긴 어때? 너 공부 잘 하는 거 봐서는 괜찮을 것 같긴 해. 나도 너 다니는 데로 끊어도 돼지? 안 된다고 하면 나 진짜 서운해. 그럼 나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까 우리 이제 집에 같이 다닐래?”

 

유현이는 혼자서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결국 실제로는 여리디 여린 우리의 마음이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우리는 유현이의 팔을 내치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그 밤에 계획해놓았던 수험공부는 전부 물거품이 되고 밤새 책상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일화는 우리를 위해서 절대 비밀로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 유현이는 ‘약속’대로 얼마 뒤에 우리와 같은 고시원을 다니게 되었다. 우리는 유현이에게 자기가 목표로 하고 있는 대학과 학과를 조심스럽게 털어놓았고 유현이는 그런 우리의 눈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잘 되길 바란다고 조금은 민망스럽게 마음을 표했다. 때때로 유현이의 그런 느끼하면서도 달콤한 표현들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여는 데 가속화시키기도 했다. 좀처럼 웃지 않는 우리도 유현이의 간지러운 말을 듣다가 웃음이 터지기 일쑤였다. 유현이가 “왜 웃어?” 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민망해하는 웃음을 지을 때는 세상에 이보다 재밌고 우스운 일이 또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두 사람은 신나게 배를 잡고 박장대소했다.

우리에게 허락된 즐거운 나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또 박탈될 위기에 처했다. 다정이는 우리를 조금도 좋아하거나 호기심을 품을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냥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하는 찌질이일 뿐인 우리를 좋아하는 유현이가 이해가 되지 않아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심지어 유현이는 그런 애와 어울리기엔 너무 괜찮은 친구가 아닌가!

 

“저녁 또 우리랑 먹는다고? 그럼 우리는?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우리 말고 바로 우리말이야.”

 

유현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들이나 우리나 서로 친해지기를 원하지 않아서 유현이는 이쪽저쪽으로 매번 옮겨 다니며 어울려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혼자 있는 우리를 챙겨주어야 해서 원래 친하게 지냈던 다정이 무리와는 자연스럽게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야 다른 사람들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지만 유현이의 친구들마저 우리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서 도무지 한 편으로 껴주지 않는 것이 유현이로선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녀는 동분서주하며 모두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 그 시간들이 피곤하게 여겨졌다. 다정이는 유현이의 마음을 잘 알면서도 어떻게든 우리와의 사이를 갈라놓는 일에 열을 올려서 더욱 유현이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유현이는 두 쪽 다 잃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우리의 마음을 열려고 했던 자신에게 이미 막대한 책임감이 주어져 있었으니 말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우리의 곁을 지켜야 하는 것이 유현이가 짊어진 사명이었다.

사실 유현이는 다정이만큼이나 우리 역시 싫지 않았다. 다정이 무리가 보는 것처럼 우리는 유현이에게 집착을 보인다든가 막 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똑똑한 친구였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 그만큼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우리 덕분에 공부에 보탬이 된 게 사실인데다 성적도 상승세를 보이고 있어서 부모님 두 분의 사이도 요새 들어 무척 좋아지고 있었다.

유현이의 부모님은 그녀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외동딸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유현이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주었다. 그러다 유현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회사 사정이 나빠져 집안에도 잠시 침체기가 찾아왔다. 평소 말싸움도 잘 안 하시던 두 분은 밤에 유현이가 자는 줄로 알고 언성을 높이는 날이 잦아졌었다. 유현이는 두 분이 예전처럼 사이가 좋아지기만을 바랐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 언젠가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릴 만큼 돈을 벌리라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차츰차츰 성적이 상위권에 들어간 이후로 부모님은 금이야 옥이야 더욱 유현이에게 정성을 들이며 뒷바라지를 해주었고 그로 인해 부부사이도 회복이 되어 점차로 예전에 화목했던 가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공부가 전만큼 쉽지가 않아 유현이는 성적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만으로는 아직 부족했다. 벌써 대입이 코앞에 다가왔고 유현이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런 유현이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였다. 틈틈이 유현이는 모르는 문제를 모아놨다가 우리에게 도움을 구했다. 우리는 별로 어렵지 않게 술술 문제의 해답을 밝혀냈다. 유현이는 마법을 부리는 사람을 보듯 신기하게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조금의 잘난 체도 하지 않고 유현이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다정이는 그런 우리를 무조건 싫다고만 하며 아이처럼 떼를 쓰는지, 답답할 뿐이었다.

유현이는 다정이와 우리의 사이를 어떻게든 좁혀보려던 열심을 그만 끊고 본격적으로 수험공부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다정이에게는 여러 말로 사정을 전해주어 겨우 이해를 시켰다. 다정이 역시 수험생이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유현이의 선택을 밉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속내는 어쩐지 조금 달랐다. 그녀는 다정이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을 알아채고 생각보다 많이 당황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줄 모를 뿐, 특정 인물을 유독 싫어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실은 지금까지 유현이 말고도 가끔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에 대해서는 마음 한 자리에 늘 고마움을 남몰래 갖고 살아왔다. 언젠가 그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준 것에 대한 감사를 무엇으로든 표시하고 싶었던 게 우리의 진심이었다. 그런데 다정이는 우리를 싫어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티를 내었다. 그녀가 유현이와 얘기를 하거나 함께 어디를 걸을 때에는 보란 듯이 노려보며 친구들과 수군덕거렸다. 그러면 유현이는 우리에게 신경 쓰지 말라며, 네 얘기가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 다정이를 변호해주었다. 아마 우리하고만 놀아서 조금 삐진 모양이니까 저가 달래주면 그만이라고 했다. 우리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었었다. 하지만 갈수록 그 말은 어수룩한 변명일 뿐인 것이 드러났다. 마음을 열지 않는 쪽은 자기뿐이라고 믿어왔던 우리에겐 다정이의 태도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유현이의 친구들이 자기의 친구들이 될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해왔다. 그러나 저들의 마음은 무시한 오로지 제 생각일 뿐이었다. 다정이는 우리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었는데, 우리만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다정이 무리에서 처음부터 내쳐진 처지에 있었다. 유현이만이 우리를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었다. 유현이로 족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빼앗기면 되찾을 수 없을 게 뻔했다. 우리는 유현이가 저를 두고 다정이 무리와 노는 꼴을 보지 못 했다. 유현이가 혹이라도 다정이 무리와 노느라 우리를 혼자 두는 일이 생기면 우리는 한동안 유현이와 대화하지 않고 그녀를 무시했다. 유현이는 금세 우리의 기분을 알아챘고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정이는 유현이가 자릴 비운 동안 완전히 우리의 심기를 거스르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봐. 불쌍해서 같이 다녀주니까.” 우리는 미친 짐승처럼 일어나 손에 집히는 물건을 죄다 던지고 발로 책상과 의자를 뻥뻥 찼다. 그대로 달려가 다정이의 머리채라도 쥐어뜯으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주변 친구들이 말려 우리를 다정이에게서 멀리 떨어뜨려놓고 붙잡고 있었다. 용무를 마치고 온 유현이는 복도 창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현이는 너무 놀라기도 하고 무서워서 교실로 들어가지 못 했다. 그녀는 돌아서서 다른 길로 향했고 아직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씩씩대던 우리는 되돌아가는 유현이를 목격했다. 그 뒤로 우리와 유현이는 한동안 어울리지 못 했다. 그러다가 시험이 다가오면서 유현이 쪽에서 먼저 우리를 찾았다.

우리는 예전과 별로 다를 것 없이 유현이를 대했다. 유현이도 그러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은 예전 같을 수 없었다. 유현이에게 이제 가장 친한 친구는 다정이뿐이었다. 다정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제 더는 유현이와 우리가 함께 어울리는 것에 대해 별로 불안해하지 않았다. 천천히 우리와 유현이의 사이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매사에 꼼꼼한 편인 유현이는 우리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는 대신 밤마다 속닥거리는 대화중에는 그것을 드러내어 다정이와의 끈끈한 유대감을 유지했다.

 

인생의 전환점까지는 아니었지만 승수도 나름 특별한 인연을 학창시절에 만났었다. 말할 것도 없이 반장이나 학생회장을 줄곧 맡아온 아이답게 총기와 자신감이 넘치는 그의 주변에는 승수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 하는 여학생들이 항상 있어왔다.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누군가는 은밀한 방식으로 승수를 차지하고자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는 결국 그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승리에 이르기도 했다. 그녀들은 예쁘기로 소문난 미모와 승수에게 뒤지지 않는 자신감과 매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많지 않았지만 그렇게 해서 주변에 있는 각 학교마다 한 명 정도 있는 특별히 눈에 띄고 유명한 여학생 중 한두 명을 승수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에 걸쳐 몇 차례 사귀게 되었었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승수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잠시 여자 친구를 사귀는 일을 멀리하고자 당시 사귀고 있던 여학생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 여학생은 지하철로 한 정거장 정도 떨어져있는 남녀공학 학교 학생으로 미대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학교가 파하면 곧장 미술학원으로 가서 입시미술을 공부하곤 했는데, 그 학원에서 승수와 같은 학교를 다니며 어느 정도 친분이 있던 여학생을 만나 친하게 지냈다. 그 친구에게 소개를 받기 전에도 이 미모의 여학생은 이미 승수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승수의 학교 친구는 승수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는지 때때로 관심을 내비치는 이 여학생에게 기어코 승수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야간자율학습이 없는 대입모의고사 날이었다. 미술학원을 다니는 같은 반 친구가 다짜고짜 자기 학원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승수는 낯설기만 한 옆 동네 유명미술학원에 발을 들였다.

 

“학원 등록할 친구 데려온 거야?”

 

학원 강사가 승수에게 관심을 보이며 물었지만 승수의 친구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미리 약속한 교실로 승수를 데려갔다.

 

“야, 여기 잠깐 있어.”

 

친구가 승수를 교실에 두고 후다닥 문을 닫고 나갔다.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인 승수는 당혹스러운 표정마저도 풋풋하고 때 묻지 않아 귀엽게 보였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한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승수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한 여학생이 등을 떠밀리며 교실로 들어섰다. 승수의 친구가 그녀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발그레 홍조가 나타난 여학생의 광대가 승수의 눈에 맨 먼저 들어왔다.

 

“안녕. 나 들어봤어, 네 이름.”

 

승수가 여학생에게 말하자 그녀는 밝게 웃으며 기쁜 내색을 했다. 사이에 중재로 선 친구 덕분에 승수와 미대준비생 여학생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얼마 안 가 두 사람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청춘들보다 훨씬 예쁜 연인 사이가 되었다. 일부러 낭만적인 장면을 연출하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었다. 함께 지하철을 타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떠나는 길, 치렁치렁한 전봇대 줄에 앉아있는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걷는 동네 산책, 아웅다웅할 필요가 있는 쓸데없는 말싸움도 다음날이면 친구들에게 늘어놓을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여학생은 승수에게 버림받게 되었다. 자존심이 상해 헤어지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승수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먼저 집으로 돌아간 여학생은 몇날 며칠 우울증에 시달렸다.

 

“나중에 다시 만나더라도 지금은 서로 각자의 길에 열중해야 할 때야. 널 위해서라고 말해도 기분이 좋진 않겠지만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정말 힘들어.”

 

승수를 바라보는 쌍꺼풀 진 커다란 눈에 증오와 원망이 서린 눈물이 맺혔다.

 

‘매너 좋은 척하지마! 네가 그렇게 잘났어?’

 

여학생은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승수에게서 돌아섰다. 떨어지는 눈물을 보이는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었다. 돌아선 그녀의 눈앞엔 얼마 전 내린 눈이 녹았다가 다시 얼어서 얼음벌판이 된 차가운 길이 펼쳐져있었다.

 

‘이제 이 길로 가야만 하는 구나.’

 

여학생은 돌아선 채 눈물을 떨어뜨렸다. 말없이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승수도 차마 더 말을 할 수가 없어 몸을 돌렸다. 그는 그늘이 진 골목길로 향했다. 그녀와 마지막 산책을 하러 나온 길이었다. 승수도 여학생과 같은 길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주변을 빙 돌아서 최대한 그녀가 먼저 지하철을 타고 떠나도록 시간을 벌었다. 그는 약간의 상실감을 느꼈다. 그것은 차차 조금씩 다가와서 현실을 잊게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승수는 더 학업에 집중하게 되었다. 한동안 승수는 쌀쌀맞진 않지만 조금 친구들과 거리를 두고 냉정을 유지했다. 승수의 고등학교 2학년 생활은 그에게만 중심을 맞춰서 생각하자면, 상당히 암울했다. 물론 승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지만 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승수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아니, 이미 기운을 차린 지는 꽤 되었다. 암울한 기분에 빠지지 않으려고 승수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했다. 그에게도 마인드컨트롤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헌데 한 가지 그를 도와주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그로 하여금 기분이 밝아지게 하는 사람이 그의 주위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는 승수가 3학년이 되고나서 분명해졌다. 그녀는 승수가 2학년일 때도 같은 반이었던 친구였다. 하지만 전혀 가깝거나 친하지도 않았고 승수보다 낫거나 비슷한 점도 별로 보이지 않는, 눈에 띄지 않는 구석자리 여학생이었다. 그녀의 머리는 대체로 엉망이거나 촌스러웠다. 교복은 원래 체구보다 조금 커보였고 실내화는 오래 되고 닳아빠졌다. 성적도 그리 좋지 못 해 선생님들도 그녀의 존재를 크게 자각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내세울 거라곤 조용함과 무뚝뚝함이 다였을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나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관심이 갔느냐 하면, 그녀의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형편없는 몰골이 관심을 끌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것으로 보이는 다른 반에 뚱뚱한 여학생과 함께 자주 다녔다. 두 사람은 마주치면 복도 구석에 서서 킬킬거리며 자기들끼리 재밌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수업종이 치면 헤어져서 각자 반으로 돌아오곤 했다.

승수 역시 2학년 때는 그녀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살았다. 그러다 3학년이 되어 같은 반이 또 되었을 때, 가만히 책상에 앉아 수학문제를 푸느라 골몰해있는 그를 어떤 시선 하나가 줄곧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그는 모른 척 문제에 집중하는 척하다가 그 누군가가 방심하고 계속 쳐다보는 사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복도 구석에서 자기의 뚱뚱한 친구와 속닥거리며 승수를 교실 문 너머로 엿보고 있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경기를 일으켰다. 뚱뚱한 친구도 크게 놀라서는, 두 사람은 황급히 승수가 안 보이는 곳으로 도망을 쳤다. 승수는 너무 웃겨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웃기는 애네?’ 승수가 혼자 비죽거리며 웃으니까 그의 친구가 무섭다며 놀리면서 지나갔다. “야, 쟤 누구지? 안경 쓰고 머리 풀어헤친 애.” “누구 말하는 거야? 맨날 구석에 앉는 애?” “우리 반이야? 뚱뚱한 애랑 같이 놀던데…….” “너 너무 한 거 아냐? 걔네 작년에 우리 반이었잖아.” “정말 그랬어?” “그런데 왜?” “아니, 그냥 웃겨서.” “걔 원래 웃겨. 어떻게 걜 모르지?” 승수는 얘기 끝에 남은 웃음을 마저 흘렸다. 종이 치고, 놀라서 기겁하고 도망갔던 여학생이 쭈뼛거리며 승수의 눈치를 살피더니 얼른 자기 자리에 앉아 눈을 피했다.

얼마 뒤, 점심을 먹고 화장실을 들렀다가 어슬렁어슬렁 교실로 돌아가던 승수는 그때의 두 사람이 정면에서 키득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복도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숨겼다.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들이 거의 가까이 왔을 때, 승수는 갑자기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여학생은 너무나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법조차 까먹고 말았다.

 

“야, 너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냐?”

 

뚱뚱한 친구가 우물쭈물하며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하니까 안경 쓴 그녀가 친구의 입을 막고 가던 길을 가려고 했다.

 

“너 나 지금 무시하는 거야?”

 

승수의 반응에 그녀는 바짝 얼어서 몸을 움직이지 못 했다. 뚱뚱한 친구가 나서서 그녀를 변호했다.

 

“우린 그런 게 아니고, 그냥 네가 닮은 사람이 있어서……. 근데 못생긴 사람은 아니야! 얘가 좋아하는 연예인이야!”

“야! 그걸……!”

“미안해!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승수는 둘이 티격태격하는 꼴이 너무 우스워서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그는 자기가 누굴 닮았다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게 누군데? 나도 알려줘.”

 

어쩌다보니 그녀는 동경해오던 이상형과 친해지게 되었다. 승수는 구석자리에 앉은 숫기 없는 여학생이 보기보다 말도 잘 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여학생이 보여준 연예인의 사진을 보고 승수는 박장대소했다.

 

“진짜 묘하게 닮은 것도 같다. 이런 걸 어떻게 찾았어?”

 

승수는 그녀를 알아갈수록 점점 더 좋아졌다. 그녀 역시 사랑에 빠질수록 점점 자신을 꾸미고 자신감을 되찾으며 승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했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지라 모두의 조롱거리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도마에 오르던 그 여학생은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이 되었고 결국 최측근에 있는 몇 사람을 빼고는 몰래 두 사람은 사귀는 사이로 발전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고, 아무도 믿지 못 할 노릇이지만 승수의 첫 경험 상대가 바로 그녀였다. 그 일은 아주 갑작스럽고 계획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 오래된 주택들이 즐비한 낡은 동네로 승수는 초대받았다. 그녀는 그날 집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막 혼란과 뜨거움의 경계를 넘나들며 일을 끝낸 찰나 그녀의 부모님과 동생들이 친척집에서 돌아와 집으로 들이닥쳤다. 당혹스러운 것은 그녀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린 동생들이 알아서는 안 될 일인지라 두 부모는 최대한 조용히 그를 집밖으로 내보냈다. 어린 동생들은 처음 보는 잘생긴 형이 마음에 들어 부모를 졸라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요청했지만 승수는 서둘러 그녀의 집을 도망치다시피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승수는 처음으로 자기를 자책하며 후회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질 않았고 뭔가 잘못될 것만 같은 불안함에 그날 밤 제대로 잠도 자지 못 했다. 그는 새벽녘에 전화를 걸어온 그녀를 무시했다. 두 사람 모두 어렵게 결정하고 맺은 관계였지만 그는 그녀가 일부러 이런 짓을 꾸민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들었다. 승수를 무너뜨리려고 그녀가 작정을 했거나 제대로 준비된 상황도 아닌데 본능을 잠재우지 못 하고 무작정 밀어붙인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가 미워졌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할 수 있다고 자기를 부추겨 수렁에 빠뜨린 장본인으로 보였다. 그는 당장 사람들에게서 받을 모욕과 비방이 떠올랐다. 이런 기분은 생애 처음 겪는 일이었다. 게다가 기분이 좋을 줄 알았던 처음 갖는 그녀와의 잠자리도 생각만큼 잘 되지 않고 서툴러서 모조리 망친 기분이었다.

그는 울며 매달리는 그녀를 졸업과 동시에 내쳤다. 여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승수는 상관하지 않았다. 여자는 무조건 잘못했다며 모두 제 잘못이라고 말했다. 용서해달라고 몇 번이고 빌었다. 그럴수록 승수는 의기양양하게 그녀를 버릴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생겨났다. “그래, 네 잘못이야! 다시는 나한테 전화하지 마. 너 같으면 네가 보고 싶겠어?” 그러곤 여자의 울음소리 섞인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승수는 다시 그녀가 금세 보고 싶고 그리워졌다. 승수도 본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잘 지내……?” 전화 한 통화만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잠시 엉망으로 살아간 때문에 예전보다 훨씬 초췌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는 승수에게 잘 보이려고 다시 자신을 가꾸기 시작했다. 그녀는 승수에게 사랑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승수는 아무에게도 그녀와의 관계를 이르지 않았고 그녀에게도 신신당부했다. “우리 사귀는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승수에게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고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승수는 입학한 대학교에 같은 학과 동기들과 개강도 하기 전에 미리 연락처를 주고받아 연락을 하며 지냈다. 또 선배들도 몇 명 미리 만나보았고 해서 오리엔테이션에 가기 전부터 대학교의 몇 사람을 알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그들에게도 승수는 여자 친구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아무 대학에도 붙지 않아 재수를 하고 있는 그녀를 만나러 고시촌에 가끔 가기는 했다. 그녀는 그다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등학생 때 비하면 놀랍도록 살이 많이 빠져 원래 마른체구였던 그녀는 잡지 속 모델만큼이나 마른 몸매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최신 유행하는 옷을 사 입었다. 잡지나 TV에 나오는 화장법을 배워서 승수를 만날 때마다 전보다 더 예뻐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승수가 공부 진도를 얼마만큼 나갔는지를 물어보면 그녀는 말을 흐리거나 다른 말로 돌리곤 했다. 두 사람이 만나서 행복할 때는 스킨십을 할 때뿐, 승수는 언제 이 관계를 정리할까 늘 그 고민만 하게 되었다. 그녀 쪽에서 먼저 돌아서주면 승수로선 최고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누구라도 나타나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주길 기다리기도 했다. 여자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녀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남자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승수에 비하면 하나도 잘난 맛이 없었다. 승수는 그녀가 아는 최고로 멋진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그녀의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더없는 행복과 우월감에 젖을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녀만이 더 매달리고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지만 곁에 없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낫다고 여기며 만족해하고 있었다. 아예 헤어지느니 그녀는 부스러기 같은 마음이라도 잡고 살고 싶었다.

때로 승수는 그녀에게 무언으로, 아니면 직접적으로는 아니어도 뭔가를 설득하려고 했다. 이런 식의 만남은 아무에게도 이득을 주지 않는다, 모두가 불행할 뿐이다, 때로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이런 게 사랑일까?’ 하는 식의 질문도 하면서……. 그녀는 고집 센 암나귀처럼 승수의 모진 말들을 모른 체했다. 그리고 마침내 승수는 결정했다. 그는 비생산적인 지루한 싸움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승수는 그녀에게 그럴 듯한 변명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는 거짓말하지 않고 입대했다. 2년이란 시간은 그와 그녀를 갈라놓아주기에 충분했다. 승수가 아니면 안 될 줄 알았던 여자도 외로움에 못 견뎌 새로운 남자를 사귀게 되었고 승수는 완전히 과거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오남희는 실패한 전략이었지만 승수에게는 통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

승수의 뒷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승수에게는 오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기도 했고 부모님들끼리 왕래가 잦아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사이였다. 그래서 한 형제처럼 허물없이 지내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두 사람의 마음이 찰떡궁합으로 잘 맞아서 오래간 사이는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또한 감춰놓은 면도 있어서 전부를 공유하고 지낸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가족관계나 가정환경, 어린 시절과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동네 친구들이라면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각자의 연애라든가 학교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은 별로 얘기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어 일부러 묻지도 않았다. 줄곧 같은 학교를 다니고는 있지만 한 번도 반이 겹친 적이 없기도 하고 고등학생 때는 이과와 문과로 갈라져서 거의 만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승수 앞에 나타난 건민이는 조금 특별하게 다가왔다.

우연인지 승수와 건민은 입학 전에 가장 먼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어렵지 않게 마음을 트게 되었다. 일부러 서로 맞추려고 한 것도 아닌데 사고하는 방식이며 떠올리는 생각들이 거의 맞아떨어져서 승수는 건민에 대한 호감이 짙어졌다. 그리고 처음 얼굴을 마주 대한 오리엔테이션에서 건민을 보고 나서는 더욱 그가 괜찮게 보였다. 그는 이제껏 알아온 친구들과는 뭔가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특별함을 발견시키던 승수는 처음으로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면이 있음을 보게 된 것이다. 건민은 늘 자연스럽게 승수의 곁을 지키거나 그의 주변에 가기를 거리끼지 않았고 괜히 자존심을 세우느라 승수에게 뒤지기 싫어하는 행동거지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승수뿐만 아니라 누가 옆에 있어도 그 사람에게 무엇으로든 이기고자 애를 쓰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재희나 도경이는 좀 더 나서길 좋아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는 모습이 지금까지 사귀어온 친구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으나 건민은 확실히 달랐다. 그것은 아이 같은 순수함이라기보다 대쪽 같은 강단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의 인품이었다. 건민은 나서서 통솔하고 사람들을 지도한 적도 없는데 사람들은 그를 신뢰했다. 그는 과묵하게 자리를 지키며 제 할 일을 눈치 빠르게 다 하면 그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왈가왈부하지도 않고 누가 저에게 뭐라 할 경우 잘 들어주는 한편 본인이 하려 했던 일에 대해서도 일말의 의심 없이 진행하는 모습은 그의 자존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건민은 절대로 자신을 비하하지 않았다. 또 주변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해주었다. 점차 그를 알아갈수록 처음 봤을 때 ‘겉보기와 다른 사람’이었던 생각이 변하여서 그의 그 얼굴이 그의 성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얼굴로 여겨졌다.

다만 승수가 그에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건민의 눈길 끝에 항상 있는 우리였다. 그의 눈길을 몰래 쫓다보면 그 끝에는 우리가 있곤 했다.

학기 첫날 승수는 구석자리에 앉아있는 한 여학생이 같은 학과 동기인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의 어두침침한 얼굴색과 잔뜩 움츠린 어깨를 보며 승수는 언뜻 제 여자 친구가 겹쳐보였다. 그는 애써 부정하며 일부러 그녀를 시험하고자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보기와 달리 밝은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한 번 기회를 줘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눈빛이 한 순간에 차갑게 변해버렸다. 잡아 죽일 듯 노려보는 우리의 눈을 보고 승수는 아찔한 낭떠러지 앞에 서있는 기분을 느꼈다. ‘어째서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지 못 하는 거지? 너 역시 너무나 어리석은 사람인 것 같아. 마치 그녀처럼.’ 우리는 좌중을 노려보는 눈으로 훑어보고 천천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저 자기소개였을 뿐인데, 우리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승수는 누군가의 도움이 조금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도경이가 시끄러운 목소리로 야유를 뱉어냈다. 그러나 그 뒤에 앉아있는 건민의 표정은 좋지 못 했다. 다들 도경이의 우스갯소리를 듣느라 집중했는데 승수의 눈에는 건민의 얼굴이 밟혔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넌 모르겠지만 난 저런 사람을 잘 알고 있어. 아주 잘 알아.’ 승수는 도리질하며 애써 건민을 외면하고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승수는 어떻게 했어야 좋았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건민마저 자기처럼 어둡고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애의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해서 건민에게 동반입대를 제안했고 역시 건민은 그의 말에 토 달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가야한다면 되도록 빨리 가는 게 좋겠지.’ 건민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승수와 함께 군대를 다녀와서 다시 복학을 할쯤에도 같이 시작하는 게 여러모로 좋으리라 여겼다. 승수의 결정 덕분에 우리 역시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멋대로 학교생활을 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대 후에 승수의 생각처럼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건민은 기어코 우리를 찾아냈고 승수가 보기에 그는 분명히 우리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승수는 결국 남은 한 가지 기대를 걸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전에 헤어진 여자 친구와 달리 공부도 잘하고 성실해보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주희를 보면 때때로 건민에게 관심을 갖는 것 같기도 한데 사실 주희가 건민을 좋아하거나 말거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차피 안 될 사람인 것이 승수의 눈에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혼자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아무리 건민이라도 주희는 그가 좋아할 만한 특징이 전혀 없었다. 차라리 재희라면 모르지만 재희도 만만찮게 눈이 높고 이미 학교 유명인사와 한창 열애 중인지라 누구 하나 주희에게 권해줄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그러니까 주희보다야 어쩌면 우리가 건민에게 어울리기는 하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변하려고 노력해서 건민과 어울리도록 더 밝아진다거나 아니면 우리보다 괜찮은 친구가 나타나 건민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승수는 무엇 하나 제가 나서서 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본인은 제3자일뿐이었다.

좋은 기회는 두 번이나 찾아왔다. 한 번은 우리가 건민에게서 떨어져나간 사건이었다. 건민의 상실감이 생각보다 심해서 승수는 그를 위해 고양이 한 마리를 선물해주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건민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고양이는 어디로 도망을 갔는지 한 번 잃어버린 이후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더 큰 슬픔에 빠졌다. 사람들 앞에 내색하지 않는 건민이 승수는 더 가엽게 보였다. 승수는 이제라도 우리가 돌이켜서 건민에게 돌아온다면 그가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 한 순간에 모두가 승수와 건민을 도와주려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들은 전부터 계획해온 MT에 우리를 기꺼이 초대하기로 마음을 모아주었다. 승수는 한달음에 달려가 우리를 설득했다. 그녀의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고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아마도 건민이 그녀를 이만큼 변화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돌아본 우리는 벤치에 앉아 해를 만끽하고 있었다. 늘 얼굴을 가리던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고 그녀의 흰 얼굴은 해처럼 빛이 났다. 승수는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은 후 돌아가서 모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건민은 얼굴을 씰룩이며 불편한 내색을 했지만 아주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두 번째 좋은 기회가 생겨났고 승수는 또 한 번 지켜볼 용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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