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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링크를 풀기 위한 우류신화 연구서(4.1)

다시 써야 할 미완성 장편소설

 

 

 

 

 

4.1

 

나 아닌 나

 

 

 

 

 

우리는 늘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걸어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이 낯선 길은 나인가, 아니면 타인인가, 나의 길인가, 타인의 길인가 의문과 함께 길을 헤매기 마련이다. 자아는 혼돈의 상태에 빠지고 그물망처럼 뻗어있던 체계는 폭풍우가 덮치며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문득 거울 앞에 선다. 낯설기만 한 저 사람, 그대는 누구인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선 자기의 모습이 낯선지 승수는 떠나질 못 하고 있다. ‘내가 왜 그랬지?’ 꿈결처럼 지나간 일들이 떠올라 후회가 막심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곧이어 그를 따라 건민이 화장실로 들어왔다. 일부러 그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준 듯 그는 천천히 들어와 전기건조기 옆 비어있는 벽에 기대어 섰다. 승수는 고개를 떳떳이 들지 못 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도 창피스러웠다. 그에 비해 너무 담담한 건민 때문에 더욱 멋쩍기만 하다. 승수는 수도를 틀어 땀이 흐른 얼굴을 씻어냈다. 차가운 물에 적셔지는 것만으로는 후끈한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는 목에 걸어 옷 속에 누벼놓은 손수건을 풀어서 얼굴과 손에 물기를 닦아냈다. 갑자기 그의 등에 손길이 느껴졌다. 건민이 어느새 다가와 승수의 등을 살짝 치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건민이 키가 작아서 어깨가 약간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일부러 그가 손에 힘을 주고 누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좀 그렇고 이따 얘기할까?”

“무슨 얘기?”

 

건민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승수는 그제야 건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건민은 조금 주저하는 듯하더니 슬며시 말을 꺼냈다.

 

“넌 우리를 싫어하는 거야, 좋아하는 거야?”

 

아까의 승수의 행동을 이해 못 하겠다는 말투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아까 왜…….”

“여긴!”

 

건민의 말을 끊고 승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놀라서 입을 다물어버린 건민을 두고 이어서 말했다.

 

“그런 자리가 아니잖아. 어제 일도 있고 말이야. 다들 기분이 어떤지 너도 알만 한데 꼭 그래야겠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말고 상황을 보란 말이야. 아마 우리 다 오늘 돌아가야 할 거야.”

“그래. 그건 상관없어.”

“……그럼 됐어. 이제 돌아가자.”

 

건민은 승수를 내버려두었다. 처음 보는 승수의 모습에 건민은 그가 낯설기도 하지만 일단 혼자 있게 두는 것이 최선일 거라고 여겼다. 그의 마른 등에 날개 뼈가 검정색 티셔츠 위로 툭 불거져 나왔다. 창백한 화장실의 불빛이 비쳐 흰 목덜미는 더욱 희고 차가워보였다.

승수가 화장실을 나와 식당가 한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 무리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려고 했는데도 자연히 들려져 우리에게로 시선이 꽂혔다. 우리를 바라보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막 따라 나온 건민은 신경 쓰지 않고 우리의 옆에 앉았다. 주희는 돌아온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하던 이야기를 마저 계속했다. 미란이가 슬기에게 눈짓했다.

 

“어, 어! 주문 받을게요. 메뉴 정하셨어요?”

 

슬기는 멤버가 불러주는 메뉴를 외워서 카운터로 나갔다. 미란이가 길게 뻗은 다리를 꼰 채로 달달 떨었다. 그 짓에 승수는 없는 정신마저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신경이 잔뜩 곤두서서 창가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근데 그때 앞집 아저씨가 갑자기 뛰쳐나오는 거야. 완전히 나체로!”

“정말요? 불륜난 거예요?”

“뻔하지, 뭘!”

“그럼 너도 다 봤겠네?”

 

건민과 미란이가 주희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몰입했다. 우리는 건민의 말에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잔에 물을 더 따르려고 물병에 손을 가져갔다. 하필 목이 타서 역시 물을 마시려던 승수와 겹쳐 손이 살짝 닿았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손을 얼른 빼내었다. 주희는 보고도 모른 체 이야기를 계속했고 미란이는 곁눈으로 두 사람을 살폈다. 건민이 우리에게 “왜 그래?”하고 물으니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사이 승수가 물병을 먼저 집어 올려 우리의 잔에 물을 채워주었다. “고마워.” 우리가 승수에게 말했다. 승수는 무뚝뚝하게 “어.” 하고 말았다. 주문을 마친 슬기가 자리로 돌아왔다.

식당가는 한산했다. 식사시간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음식점이 근처에 많이 있었기에 관광지 안쪽에 차려놓은 맛도 별로 없는 패스트푸드점은 이곳에서 인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일행은 조용한 곳에 오길 잘했다고 나름 만족해했다. 입맛도 없거니와 승수의 말처럼 모두들 약간 울적한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잠깐 긴장을 풀어버린 미란이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동시에 이야기가 뜨문뜨문 거의 떨어진 주희가 미란이의 한숨에 동요되어 말이 없어졌다. 6개의 물 컵에 송골송골 이슬이 맺히고 테이블에는 휴지 몇 조각과 컵을 타고 흘러내린 이슬이 모여 만들어진 물기만이 유일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것이었다. 주희는 애꿎은 휴지만 길게 찢으며 무겁게 내리누르는 시간을 견뎌냈다.

 

“현아가 전화를 안 받네?”

 

밖에서 담배를 태우던 재희가 유리문을 등으로 밀면서 일행에게 소리쳤다. 그는 한 손으로 전화기를 들어 귀에 대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여전히 담배가 한 개비 쥐어져있었다. 승수가 고개를 들어 재희에게 대답했다.

 

“그렇잖아도 먹고 들어갈 거야.”

“에! 벌써요?”

 

미란이의 말투는 전혀 아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횡재란 늘 그렇듯 생각지도 못 한 순간에 찾아와서 사람을 기분 좋게 당황시키곤 한다. 승수가 눈을 내리 깔고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역시 그럴 줄 이미 알고 있었다. 테이블에 올려둔 벨이 진동했다. 슬기가 얼른 일어나 주문했던 은박지에 싸인 핫도그와 콜라가 올려져있는 접시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재희는 생각이 없다더니 정말로 들어오지 않고 내내 휴대전화만 붙들고 있었다. 해가 상당히 뜨거울 텐데도 참을 만한 모양이었다. 하기는 인도를 두르고 있는 철망 바깥에서 바닷바람이 꽤 시원하게 불어와서 덥지는 않을 것이었다. 승수는 바깥 벤치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폼을 재며 앉아있는 재희를 말없이 쳐다보면서 핫도그를 입 안으로 구겨 넣었다. 그 사이 미란이는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언니, 그래서 그 아저씨 어떻게 됐어요?”

 

주희가 입에 막 음식물을 집어넣어서 기다리라는 의미로 눈을 깜빡이며 미란이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아! 그 아저씨? 나도 몰라. 풍기문란 죄로 유치장 갔다나봐. 자세한 건 몰라도.”

“그럼 이제 밤에 조용해졌겠네요?”

 

슬기의 대꾸에 주희가 자기 무릎을 탁 치며 “그럴 줄 알았지?”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알고 보니 그 집 여자가 진짜 애인이 또 있더라고. 요새는 내가 아빠 집에 가있어서 밤에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냥 다음 학기에 이사 갈 거야. 지금 집 알아보고는 있는데…….” 주희는 새 집을 구하는 일과 관련해서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역시 대학원을 들어가야 할 것 같다는 둥, 그러려면 당장 취업자리 알아보는 것보다 집을 구하는 게 시급하다는 둥, 방음이 잘 되는 집을 구하든가 관리가 철저한 데를 찾아봐야겠다는 둥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다들 주희가 말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희의 바람대로 그녀의 상실감은 아무도 읽지 못 했다.

 

“현아야, 우리 왔어! 일어났니?”

 

미란이가 제일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큰소리로 현아를 불렀다. 불 꺼진 집안에는 정적 속에 먼지만 날아다녔다. 그녀는 주방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가 현아가 누워있을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제 그만 일어나! 아직도 아파?”

 

이불이 몽글몽글 구겨져 있어서 미란이는 침대 안에 여전히 현아가 누워있을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침대 가에 걸터앉는데 이불 끝이 움푹 꺼졌다. 사람이 안에 누워있다면 있을 수 없는 꽤나 이상한 현상이었다. 미란이는 이불을 살짝 걷다가 비어있는 베개를 보고 완전히 치워버렸다. 그 안에 있을 줄 알았던 현아가 안 보였다. 1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사람들이 주방에 모여 있었다. 주희는 한쪽 입 꼬리를 올리더니 미란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재희는 침통해보였다. 그의 손에 종이가 한 장 들려있었다.

 

“강현아 튀었어.”

 

주희가 이해 못 한 얼굴로 다가오는 미란이에게 일러주었다.

 

“뒤통수 제대로 치네?”

 

슬기가 중얼거렸다.

돌아올 때 운전을 한 승수가 차를 원래 있던 자리에 주차하고 차고 문을 완전히 내린 뒤에 집으로 들어섰다. 우리와 건민은 거실 소파에 앉아 조용히 대화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 일행들은 주방에 서서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형, 강현아가 돈 여기 두고 가버렸어요.”

 

슬기가 승수를 돌아보며 알려주었다. 승수는 재희가 건네주는 쪽지를 받아들었다. 몸이 안 좋아 먼저 가겠다는 별 의미 없는 쪽지였다. 봉투 안에는 그들이 여행 기간 동안 쓰려고 모은 회비가 전부 들어 있었다. 아직도 상당량이 남아 있는 것을 보자 승수는 왠지 속이 쓰렸다.

 

“우리도 청소하고 짐 정리하고 되도록 빨리 떠나자.”

 

그는 담담히 말했다. 일행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집 구석구석 청소했다. 미란이와 주희는 저희들 방 청소를 끝내고 우리를 도와 그녀의 방도 청소해주었다. 승수는 짐을 정리하는 도중에 그의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대강 알렸다. “네, 금방 갈게요.” 짧은 통화를 끝내고 승수도 마저 청소를 도왔다.

주방을 치우던 재희와 건민이 방안에 있는 승수를 불렀다.

 

“음식물들은 다 어쩌지? 다시 소포 붙여야 할까?”

“그냥 놔두자. 어차피 주인아저씨도 곧 휴가라서 내려오신대.”

“그게 낫겠지?”

 

승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풀어놓은 짐을 싸러 제 방으로 돌아갔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와 얇은 속 커튼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었다. 비스듬히 열려있던 방문은 바람에 의해 살살 닫히는가 싶더니 마지막에 “쾅!”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승수가 놀란 마음에 방문을 째려보았다. 그 앞에 겁먹은 눈을 하고 있는 우리가 서있었다. 승수는 더욱 놀랐다. 그녀는 어색한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선 자리에서 요지부동이었다.

 

“짐은 다 쌌나보지?”

 

승수가 괜히 퉁명스럽게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서 가. 시간 없으니까.”

“난 여기 더 있고 싶어.”

 

우리의 말을 잠시 다른 뜻으로 이해한 승수가 얼굴을 붉혔다.

 

“그건 네 자유야. 더 있고 싶으면 너 알아서 해. 나나 다른 사람들은 가기로 결정했어.”

“돌아가면 나하고 말 안 할 거지?”

“무슨 소리야?”

 

승수는 짐을 싸다 말고 다시 우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에 대해서 전부 모른 척하고 지낼 거잖아.”

“내가 왜……?”

 

우리의 눈에 눈물이 약간 고였다. 승수는 그녀의 얼굴을 더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옷가지를 트렁크에 담았다. 우리도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승수가 막 접어놓은 반팔티를 집어 가방에 넣으려는데 흰 손이 그의 팔뚝을 어루만지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승수의 코로 어떤 감정보다도 먼저 아릿한 향기가 빨려 들어왔다. 우리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승수의 팔을 간지럽혔다. 그는 조심스럽게 팔을 빼내고 돌아서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볼을 타고 내려온 한 줄기 눈물이 뺨에 얼룩져있어 승수는 손을 들어 엄지로 그것을 닦아주었다.

 

“넌 정말 이상한 애야. 알수록 이상해. 아무도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은 없어.”

“난 해.”

“이렇게 하면 믿을래? 이렇게 하면 걱정이 안 들까?”

 

그는 말을 하면서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어색하게 팔을 들었다 내렸다 반복했다. 승수의 눈을 바라다보던 우리가 눈치를 채고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갔다.

 

“한 번 해봐. 느껴보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어.”

 

승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우리의 어깨를 잡았다. 다시 팔을 천천히 내리곤 그녀를 품안으로 당겨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머리에서 푸름이 느껴지는 신비로운 향기가 났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갑자기 창을 통해 큰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높이 쳐 올라 펄럭였다. 불어오는 바람을 빼고 모든 사물이 일시에 정지된 것 같았다. 멀리서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서서히 승수는 현재로 돌아왔다. 우리가 이내 몸을 빼내려고 꿈틀거렸다. 승수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네. 이제 안심이 돼.”

 

얼굴에서 붉은 기가 가시고 맑은 빛을 띠며 승수가 물었다.

 

“괜찮아졌어?”

 

우리가 문가로 멀어지며 대답했다.

 

“‘이제 돌아가도 괜찮구나.’ 그런 느낌.”

 

두 사람은 마주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방을 떠나고 조금 이따가 건민이 들어와 가방을 쌌다.

 

“가는 길은 좀 힘들겠네. 짐도 많고.”

“그렇겠지!”

 

건민의 말에 승수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건민이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승수는 아까보다 개운한 얼굴로 짐을 다 싸서 옮기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다가 건민은 혼자 고개를 저으며 다 싼 짐을 현관 앞에 갖다 두었다.

다들 이만하면 처음이랑 거의 한 치의 오차도 없다며 짐을 챙겨서 바깥으로 나왔다. 구석에 놓인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고 나온 사실을 알아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현아가 갔을 때처럼 콜택시를 불렀다. 짐을 실을 수 있는 밴을 찾으니 겨우 한 대가 이제 막 손님을 내려주어서 좀 기다려야 할 거라고 콜센터 직원은 설명했다. 바닷바람을 쐬며 잠시 길거리를 서성이는 일행을 보고 승수는 가져온 카메라를 꺼내 삼각대 위에 올렸다. 일행은 집 앞에 모여서 뜨겁게 내리쏘는 햇볕에 손으로 챙을 만들어 눈을 죄다 가리거나 얼굴을 찌푸리며 사진기 앞에 섰다. 승수가 타이머를 맞춰놓고 재빨리 달려가 먼저 서있는 무리 사이를 마구 비집고 들어갔다. 그 바람에 축 쳐진 얼굴로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던 일행이 ‘와!’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연속으로 촬영된 사진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즐거운 표정으로 순간을 장식했다. 일순 몇 사람은 짧았던 이번 여행을 곱씹으며 그들이 상상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고까지 평가를 내렸다.

잠시 후, 검정색 밴이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덜컹거리며 들어와 일행을 싣고 터미널에 데려다줄 즈음에야 누구든지 좋은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터미널에 와서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동향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같은 차를 타야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쉬운 발걸음을 억지로 떼는 냥 하다가 일행이 거의 보이지 않는 데까지 멀어지면 날아갈 듯 가볍게 버스에 올라탔다. 결국 이들의 MT는 서로에게 찝찝함만 남기며 끝나고 말았다.

미란이는 승수와 건민, 우리까지 세 사람과 가는 길이 같았다. 재희와 주희, 슬기는 각자 다른 승차장으로 건너가 버스를 기다렸다. 재희는 계획에도 없던 고향 길로 떠났다. 때문에 급히 집으로 전화해 오늘 갈 테니 알고 있으라고 그의 어머니에게 통보 식으로 전했다. 주희는 미란이가 보내는 간절한 눈빛을 읽었으면서도 전혀 못 본 척했다. 기어코 자기와 함께 가자고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하는 미란이에게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하고 싶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 집에서 잘 수도 없으며 부모님도 새 집을 구할 때까지 거기서 지내는 것을 걱정하시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고 거절했다. 미란이는 최대한 상한 마음을 감추고 주희를 보내주었다. 작별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주희는 따로 탄 차에 앉아서 따지고 보면 저도 미란이를 위해 보내기 싫어도 먼저 보내준 적이 있었던 일이 생각나 스스로 아주 의리 없이 군 것은 아니라고 합리화했다. 게다가 미란이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남아있지도 않았다. 돌아가는 내내 주희는 차창에 얼굴을 붙이고 한 바가지 눈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첫사랑을 영영 떠나보내는 주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란이는 오로지 자기와 끝까지 함께 하지 않은 주희에게 마음이 상해버렸다. 함께 앉아 가려고 했던 우리에게는 자리도 많으니 따로 앉는 게 서로 편하다는 핑계로 제 자리를 일행과 떨어진 자리에 맡았다. 그녀는 주희의 수작을 승수에게 일러바친 일이 새삼 고소했다. 앞으로 주희와 어울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미란이는 휴대폰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 사이 미란이와 당연히 함께 앉을 줄 알았던 우리의 옆자리가 비어 건민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 옆에 앉으려고 했다. 허나 승수가 제지했다. 몸도 피곤한데 다 따로 앉아서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건민은 그의 말에 수긍해 우리의 건너편 자리를 맡았다. 우리는 그런 건민을 보며 배시시 웃어주었다.

이런 와중에 슬기는 여전히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정황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관심도 없어서 크게 고민하는 바도 없었다. 그는 그저 왜들 그리 기분이 안 좋아졌는지, MT는 왜 하다 말고 도중에 끝낸 건지, 그리고 특별히 눈에 들어온 적 없던 우리 선배가 왜 자꾸 눈에 밟히고 생각이 나는지 하는 단순한 질문을 번갈아서 던지다가 기나긴 버스 여행에 지쳐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코를 골며 잠에 빠져버렸다.

완전히 곯아떨어져서 단잠을 자고 있던 슬기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는 꿈속에서 깊은 암흑에 갇혀 있었다. 너무나 어두워서 암흑 속에 갇혀서도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만 귀가 먹먹하고 숨을 쉬는 일이 갑갑해져서 그는 금방 겁이 나고 말았다. 숨이 막혀 거의 질식을 할 정도가 되자 그는 어떻게든 눈을 뜨려고 온몸을 버둥거리며 안간힘을 썼다. 마침내 눈이 떠졌음에도 그는 여전히 눈앞이 캄캄한 것을 깨달아 곧 패닉에 빠졌다. “악!” 슬기의 비명소리에 놀란 버스 기사가 차를 갓길에 세우고 슬기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슬기를 내려다보았다. 버스 기사가 차안에 불을 밝혀서 슬기는 자신이 무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꿈을…….” 버스 기사가 슬기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면장갑을 꺼내 슬기의 이마에 맺혀있는 구슬땀을 닦아주며 나무랐다. “원, 사내 녀석이 별 주접을 떨고 그래?” 주위에 얼마 없는 승객들이 놀라서 그를 넘어다보다가 별 일 아닌 것을 알고서 도로 자세를 편안히 취했다. 괜히 민망해진 슬기는 뒤로 젖힌 좌석을 올려 세우고 휴대전화를 꺼내보았다. 휴대폰에 이어폰을 끼우고 신나는 음악을 틀어 귀에 꽂았다. 그는 아직 진정되지 않은 가슴을 손으로 살짝 눌러보았다. 무슨 놈의 꿈이 이토록 선명하고 실감날 수 있을까?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그는 목덜미에 흥건한 땀을 손목으로 닦아냈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강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웨에 빽빽이 들어찬 차들로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는 고장 난 장난감처럼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연달아 브레이크를 밟아 급정거를 하는 통에 우리는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옆을 보니 건민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입만 움직여서 ‘토할 것 같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앞에 앉아서 좌석 위로 머리만 볼록 솟아나온 승수를 보았다. 그가 자고 있는 건지,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이미 석양이 지고 저녁이 되어 어두운 보랏빛이 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라색 하늘 아래 얇게 퍼진 구름 사이를 빨간 등과 노란 등을 깜박이며 지나가는 비행기가 있었다. 그리고 버스는 조각난 하늘 아래 우뚝 서있는 건물과 거리마다 환한 불이 켜져 있어 여전히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으로 한 보 한 보 걸어 들어갔다. 장마가 끝나 벌써 며칠째 비가 오지 않은 마른하늘과 마른 땅은 인간이 살기에 최적화된 환경인 것 같았다. 뜨겁게 달궈진 땅 위에 우두커니 서서 길을 건널 순간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오로지 길을 건너기 위해 온 신경을 가져다 쓰고 몰입했다. 막상 신호가 바뀌어 길을 건널 수 있게 되어도 그다지 기쁘지 않은 얼굴, 피곤하고 지친 얼굴로 저마다 똑같은 표정을 한 타인의 얼굴과 얼굴 사이를 드나들었다. 다른 누군가의 발에 채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여기면서…….

강의 폭이 넓기도 무척 넓었지만 이 길에서 저 길로 건너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질서 없이 제 앞만 보고 달려드는 바람에 버스는 다리 위에서 거의 50여분을 탕진했다. 버스기사며 승객들이며 할 것 없이 다들 진이 빠져 녹초가 된 상태로 하차했다. 터미널 하차장도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붐비는 사람들로 우리는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승수가 붙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제 짐도 채 꺼내들지 못 하고 사람의 홍수 속에 떠밀려 길을 잃어버렸을 것이었다. 그녀는 갑갑한지 숨을 크게 들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건민이 뒤에서 다가와 “괜찮아?”하고 물어왔다.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우리를 부축해 대합실로 데리고 갔다. 승수가 우리의 짐을 대신 들고 가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미란이가 승수를 불러 세웠다. “오빠, 전 이 길로 가는 게 빨라서 이쪽으로 갈게요!” 승수는 고개만 끄덕이고 채 대답도 못 했는데 미란이는 속전속결로 인사를 마치고 군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러다간 자기 역시 건민과 우리를 놓치게 될 노릇이라 그도 서둘러 대합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건민이 우리에게 손부채질을 해주며 “오늘따라 사람이 엄청 많네. 누가 깔려 죽어도 모르겠어.” 하고 중얼거렸다. 우리는 더욱 힘이 풀리며 식은땀이 나고 갈증이 났다. “목말라.” 그 말을 듣고 건민이 냉큼 매점으로 달려가서 물을 한 병 사왔다. 우리는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물 한 병을 다 마셨다. 그제야 개운해졌는지 기운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수는 옆자리에 말없이 앉아서 바닥만 응시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만 보여서 그는 엉뚱하게도 몸뚱이의 반이 뚝 잘려 하반신만 가지고 걸어 다니는 그림을 상상했다. ‘고개를 들면 사람들의 허리 위는 전부 사라져있고 다리만 따로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몰라’ 하며 딴 생각에 빠졌다. 갑자기 호기심이 요동을 쳐서 그는 흘깃 고개를 들고 보았다. 아까 본 풍경과 다를 바 없이 식상했다. 나무 등걸처럼 무덤덤한 표정의 사람들이 먼지만 잔뜩 일으키며 길을 떠나고 있었다. 옆에서 우리와 건민의 말소리도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건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승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승수가 자기 손을 내밀어 그의 손에 얹으려고 하자 건민은 손을 빼내고 “우리 가방 달라고.” 하고 말했다. 승수는 괜히 겸연쩍어하며 우리의 가방을 건네려다가 “왜? 가려고?” 하고 물었다. “응. 내가 집까지 데려다 주려고.” 건민이 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승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집이 어딘데? 나랑 방향이 같으면 같이 가자. 난 아빠가 근처에 계셔서 이쪽으로 오신댔어.” 건민이 고개를 저었다. “바로 집으로 갈 건 아니라서…….” 우리도 거들었다. “잠깐 들를 데가 있어.” 승수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둘이 뭘 그렇게 감추는 게 많아? 나도 같이 가.” 우리가 곤란한지 승수의 눈을 피해 건민을 쳐다보았다. “별 일 아니야. 피곤할 텐데 먼저 가서 쉬어.” 건민이 꽤 완강하게 나왔다. 승수로선 다른 도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정말 비밀인가 보네. 알았어. 먼저 갈게. 너희들도 조심히 들어가.” 승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보내주었다. 그는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흘끔거리며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보았다. 승수는 눈으로 우리와 건민을 좇으면서 전화를 걸었다. 그의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 “오고 계세요? 아, 아직 이세요? 아무래도 뒤풀이 정도는 해야겠어요. 먼저 들어가세요. 예, 이따 뵐게요.” 그는 다정하고 한 톤 높인 목소리로 아버지를 상대했다. 아버지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승수에게 너무 늦지 말라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승수는 온 힘을 다해 뛰었다. 덜거덕거리는 가방 때문에 거추장스러워서 잘 뛸 수 없었지만 그는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저 앞에서 택시에 오르는 두 사람이 눈에 보였다. 승수도 얼른 길가로 나가서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 저 앞에 택시 좀 쫓아가주세요.” “허, 애인이 바람이라도 났어?” “아뇨. 일행이에요. 어서 가주세요.” 택시기사는 승수를 곁눈으로 훑어보며 별스런 청년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출발했다.

아까보다 도로의 정체는 많이 풀려있어 차는 앞으로 쭉쭉 잘 나갔다. 증권가와 상가들이 즐비한 거리, 재래시장, 고가도로를 지나 꽤 많이 달렸다. 이제 승수는 저들이 어디로 가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의 눈에 낯익은 동네와 간판들이 나타났고 저 위로 높이 언덕진 곳에 세워진 대학교 정문이 불을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건민과 우리가 탄 택시는 그들이 다니는 학교도 지나쳤다. 학교 주변 번화가를 향하는가 싶더니 좀 더 지나서 택시는 사람들이 저녁 산책하기에 좋은 하천공원에 다다라서야 갓길에 차를 세웠다. 승수는 일부러 돈을 천천히 세서 택시비를 지불하는데 시간을 끌었다. 건민과 우리가 차에서 내리고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거리를 적당히 두고 걷기로 했다.

두 사람은 한 쌍의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아 깍지 끼고 천천히 몸을 흔들며 산책로를 따라 걸어갔다. 더위를 피해 나온 도심의 시민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도 건민과 우리를 축복하며 환영해주는 호응으로 들려왔다. 둘은 조금 걷지 않아 경사진 풀밭으로 살살 내려갔다. 거기서도 멈추지 않았다. 무거운 가방만 내려놓고 더 가서 흐르는 하천을 내려다볼 수 있는 물가로 가까이 나아갔다. 많이 불었다가 요새는 조금씩 줄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양의 물이 세차게 하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니 잠깐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가도 좋을 법 싶었다.

 

“지난번에 여기서 있었던 일 기억나지? 우리 여기서 헤어지고 한동안 모른 척하고 지냈잖아. 그동안 난 많이 후회했어. 그냥 이것저것 전부 다 후회가 되어서…….”

 

우리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건민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제일 많이 후회했던 일이 있어. 어쩌면 여기 물고기가 살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내가 무시했지. 다시 와서 생각해봤어. 너는 날 왜 떠났을까? 어쩌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못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더라고. 그런데 내가 무시한 거야. 너 그 날 분명히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 그 이후로 밤마다 누군가를 따라가는 꿈을 꿨어. 그게 누군지 보이지가 않았지만 아마 너였겠지. 한 번도 그 사람을 따라잡은 적이 없어. 그럴 수밖에……. 정작 보여줘도 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건민은 애꿎은 모래를 한 움큼 집어 강물에 뿌렸다. 옆에서 너무나 조용히 평정심을 찾고 앉아있는 우리로 인해 그는 부끄러워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색하게 구는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 건민은 어떻게든 더 말을 끌어냈다.

 

“하지만 언제나 네가 네 이야기를 피했기 때문에 난 더 이상 물어보는 건 우리 사이를 금 가게 할 뿐이라고 생각한 거야. 언제라도 듣고 싶었어. 지금이라도 상관없어. 네 마음이 편한 때에 나한테 말해줘. 네가 할 수 있는 말은 전부 다. 내 말 듣고 있지? 여기 온 건 너한테 사과하려고 온 거야. 정말 미안해 우리야. 널 끝까지 지켜주지 못 해서 정말 미안해.”

 

우리는 어두운 강물에 제 얼굴을 비춰보였다. 그녀는 우류를 떠올렸다.

 

“사실 이 안에 물고기보다 더 한 게 살고 있을지도 몰라.”

 

건민이 멍한 눈길을 우리에게 보냈다.

 

“그뿐이야. 나한테 잘못한 거 없어.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우리의 말을 듣다가 건민은 어깨를 들썩였다. 우리가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혹여 있더라도 그 시간은 다 지나가고 말았지. 우리가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거야. 여기 이 물에 묻어둘 만한 건 최대한 묻어두자.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우리가 울음을 터뜨린 건민을 안아 몸을 흔들어 달래주었다. 그가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 아닌 것을 우리도 알고 있었다. 건민은 그저 자그마한 위로가 필요했다. 위로는 때로 사람에게 용기와 지혜를 가져다주곤 한다. 자책과 후회는 아무 쓸모없는 일인 것을 모든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건민에게 건넸고 그는 정말로 우리 말대로 과거를 저 아래 낮은 돌층계의 폭포로 떨어지는 물과 함께 흘러가게 두었다.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사람들 틈바구니에 몸을 숨기고 건민과 우리를 훔쳐보던 승수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수그리고 우는 듯이 보이는 건민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안 들렸지만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들켜버리면 둘러댈 말도 없어서 그는 답답해하며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 수간 승수의 휴대전화에서 갑자기 벨소리가 크게 들려 그는 화들짝 놀라 전화기를 꺼내었다. 어머니의 전화였다.

 

<“승수야! 어머나 세상에! 너 아무 일 없는 거니?”>

 

승수가 전화를 받자마자 그의 어머니는 흐느끼며 별안간 큰소리로 말했다.

 

“왜 그래요, 엄마?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이라니! 너만 괜찮으면 나는 산다! 나는 살아! 승수야, 어디야, 지금? 응?”>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저 아무 일도 없어요. 저 지금 친구들이랑…….”

<“그러지 말고 집에 어서 돌아와!”>

 

엄마의 이유 없는 재촉과 알 수 없는 염려에 승수는 더 이상 인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무슨 일인지 되물었다.

 

<“아유, 난 또 너희들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니! 정말 여기 다 왔어? 잘 했다, 잘 했어. 지금 뉴스에서 속보가 뜨고 난리도 아니야, 얘야!”>

“저 금방 들어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너희들은 다 무사한 거지?”>

“그럼요.”

<“아무튼 해마다 이맘때면 젊은 애들이 저희들끼리 놀러 나가서 죽어나가고 말이지, 쯧쯧! 하필이면 또 네가 간 곳에서 사고가 났대서 나 혼자 뉴스 보다가 확 뒤로 고꾸라질 뻔했다. 어머! 네 아빠한테 전화 왔다! 네 아빠도 걱정 돼서 전화한 모양이네. 다시 전화할게, 승수야!”>

“어, 엄마! 아빤 저 온 거 아시는데…….”

 

승수의 말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눈으로 끊임없이 건민과 우리를 주시하느라 엄마와의 통화에는 거의 집중하지 못 해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이처럼 조신하지 못 한 모습을 보인 적은 흔하지 않지만 어쩌다 한 번 있기는 했다. 승수는 때로 엄마의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면 귀엽게 여겨지곤 했는데 오늘따라 그는 일일이 장단 맞춰주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막무가내로 전화를 하고 끊어버리다니,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데!

건민과 우리는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승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는 불청객일 뿐, 반겨줄 사람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겠지만 그의 부모님만큼은 그래도 무사히 돌아온 승수를 눈물로 맞이해 줄 것이다. 더욱 묵직하게 느껴지는 그의 커다란 여행용가방, 허리춤에서 덜거덕덜거덕 뒤를 꼭 붙어 다닌다.

 

생애 가장 긴 여름방학을 보낸 승수의 무리는 곧 다가올 개강을 준비하며 심기일전했다. 실상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희는 미란이와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듯 저쪽에서도 오지 않는 전화를 굳이 본인이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녀는 이사문제라든가 대학원 입시문제로 영어 점수를 단기간에 올릴만한 학원을 끊어야 하는 일들로 바빠서 잠시 정신을 딴 데로 돌릴 핑계거리가 생긴 것이었다. 영어 학원을 다니는 동안 주희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주로 남자 친구들을 쉽게 사귀었다. 그들은 주희가 학교에서 사귄 친구들과는 생판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목표로 하는 회사 이력서에 넣을 영어 점수가 필요한 그녀보다 두세 살 나이 많은 오빠들이나 주희와 같이 대학원 또는 대학교 편입을 위해 점수 올리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다른 대학 남학생과 몇 명의 여학생이 있었다. 학원이 파한 후 일부러 모임을 갖거나 하지는 않고 ‘모두 목표한 것을 이룬 뒤에 연락하자.’는 공식이 생긴 인연들이었다. 그 중에 가장 연장자인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주희에게 고백을 했다. 얼마나 깊은 애정이 생겨나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상당히 진지하게 연인 관계로의 발전을 얘기하는 남자에게 주희는 가차 없이 냉담한 말투로 거절했다. 면전에서 거절을 당하고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남자는 사람 좋은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며칠 주희를 대하더니 돌연 사라지고 말았다. 아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몇 구역 떨어진 학원으로 옮겨갔다. 마음의 상처가 꽤 깊은 모양이었다. 주희는 그가 좀 쪽팔려서 그랬거니 하고 가볍게 넘겨짚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남자는 주희를 잘못 보았다. 그녀의 능숙한 입담에 속아 꽤 성숙하고 진취적인 여성스런 인물이라 착각한 것뿐이었다. 해서 그의 상실감과 패배감은 어쩌면 안개보다도 흐린 것이었다. 어쨌든 주희에게는 귀찮은 주변인물이 하나 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이었다.

미란이는 오래 사귀어온 회사원 남자친구와의 기념일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이별을 통보 받았다. 그녀는 너무 자주 불안감을 느꼈고 그때마다 매일같이 야근과 업무에 치이고 있는 남자를 들볶으며 위안을 달라고 보채었다. 남자는 상사에게 업무평가를 높게 받고 있었고 사원으로 있은 지도 충분한 시간이 흘러서 이제 승진을 거의 코앞에 둔 상태였다. 변명이 아니라 남자는 당연히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미란의 불평과 불만은 그가 받아줄 수 있는 한도를 포화하고 있었다. 뒤로 더 물러설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잠시 시간을 갖자는 말을 남겼는데 그건 더 이상의 만남은 없을 거라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 자존심이 센 미란이는 절대로 그를 붙잡고 늘어지거나 한 통의 전화도 먼저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서서히 인연은 끊어졌고 눈물의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미란은 중학생 때부터 단짝으로 지내며 여전히 가장 친한 여자 친구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때때로 그 친구와 카페에서 만나 전 남자친구를 욕하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며 꺼슬꺼슬하게 남아있는 잔 감정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녀는 한편으로 이런 상황에서 단 한 번도 연락을 해주지 않는 주희가 원망스러웠지만 잘 된 것 같기도 한 기분이었다. 오히려 주희의 전화를 받으면 기분이 더 껄끄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강을 하고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그때만 잠깐 예전처럼 지내는 척하고 앞으로는 동기들과 자주 어울려도 나쁠 게 없으리란 생각에서였다. 미란이가 어울리는 동기들은 그녀와 비슷한 성향의 여자들이었기에 함께 몰려다니다가 헤어지는 것이 자유자재인 포스트잇 관계였다. 필요하면 붙어도 좋고, 단독으로 행동하는 것도 모두 이해해주는 동기들이었다. 수업시간표도 자기 자신만을 고려해서 정하면 그만이었다. 모든 강의를 혼자 듣게 된다 해도 아무 염려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 그녀의 눈에는 조력자로 보였다. 친절하면서도 악랄한 사람들, 순진하면서도 멍청한 사람들, 미란이는 누굴 만나게 된다 해도 자신만만했다.

 

이제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둔 우리는 더욱 특별한 새 학기를 맞게 되었다. 때는 개강을 하루 앞둔 전날 밤 자정이었다. 포부나 야망을 남김없이 바닷물 밑으로 가라앉히고 떠나온 우리는 어느 때보다 평화로이 잠들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쓸데없는 염려를 그만두게 된 후로 우리는 잠도 깊이 자고 밤새 머리를 싸매느라 끙끙 앓지도 않게 되었다. 그런 그녀를 깨운 것은 주기적으로 타이밍을 맞춰 ‘똑, 똑’ 떨어지는 물소리였다. ‘물을 제대로 안 잠그고 누웠나?’ 얼었다가 해동되어 조금씩 녹아들듯 잠에서 깬 우리는 그다지 피곤하지 않아 편안히 눈을 떴다. 시계 초침이 한 칸씩 끊어져서 도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러나 문제의 물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꿈을 꾼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똑똑히 물소리를 듣고 잠을 깼다. 그녀는 잠자코 소리에 집중하려고 뜬 눈을 도로 감았다. 눈을 감고 있자 다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분명 물소리잖아. 바로 이 방안에서 들리는…….’ 우리는 눈을 감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불이 스르륵 밑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한 칸 밖에 되지 않는 방안의 구조를 눈을 감아도 훤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눈을 감고 일어나서 물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멀지 않은 데서 ‘똑, 똑’ 소리가 우리의 귀를 트이게 했다. 그녀는 이제 다 왔다는 기분이 들어 슬며시 눈을 떴다. 책상 앞에 서서 눈을 뜬 우리는 또 소리가 멎어버린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제 소리는 더 필요치 않았다. 소리의 진원지를 우리는 찾고야 말았다. 푸른 옷을 입은 그녀의 물고기는 어느새 우류로 변해있었다.

 

“우류구나.”

 

조그마한 몸으로 우리의 어항 속에 들어가 있는 우류는 고개만 수면 위로 빼고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밤 대형 보름달이 훤칠하게 요 아래 세상을 밝혀주었었다. 우리는 창가의 커튼을 걷어 매듭으로 묶어놓았다. 달빛이 창문을 통해 방으로 내려들어왔다. 우류는 은은한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몸뚱이를 흐느적거렸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어항 가까이에 코를 들이밀고 우류와 눈을 맞추었다.

 

“아득한 밤을 빌려서 오늘은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니?”

 

우리는 한결 여유로워진 태도를 취했다. 우류는 그녀에게 눈을 감으라는 듯 손을 들어 눈을 내리 쓰다듬는 몸짓을 했다. 우리는 이제 겁먹지 않고 우류가 하라는 대로 다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하지도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우류는 그녀가 눈을 감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금씩 우리의 잠재된 의식을 톡톡 건드려 깨웠다. 우리와 우류는 그녀의 무의식 가운데서 재회하게 되었다.

 

“우리야, 내 말 들려?”

 

우류의 애달픈 목소리가 우리의 전신을 타고 스며들었다. 정신이 번뜩 들어온 우리는 그에게 대답했다.

 

‘오랜만이야, 우류. 잘 지냈니?’

 

우류가 ‘뽀그르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왜 웃는 거야? 그렇게 반가워?’ 우리가 되물었다. 우류는 다시 한차례 웃더니 우리에게 바짝 다가가 말했다.

 

“난 한 번도 오랜만인 적이 없어서 그래. 넌 잠을 너무 깊이 자는 것 같아. 매일 너를 찾아온 나를 한 번도 반겨주지 않고 잠만 잤어!”

 

우리가 놀란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난 몰랐어!’

“아냐, 차라리 잘 됐어. 더 깊이 자도 문제없겠던데, 뭘.”

‘더 깊이? 그럴 수가 있을까?’

 

우류가 희미하게 미소를 보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우리는 느껴졌다.

 

“그 날은 최고로 행복한 하루였어.”

 

여기까지만 듣고도 우리는 감이 왔다. 그러나 우류가 끝까지 말하기를 기다려주었다.

 

“지금도 가슴이 뛰는 것 같아. 네가 내게 양보했던 그 날 하루 말이야.”

‘나한테 아쉬울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물을 줬잖아. 분명 달라졌겠지?”

‘달라졌냐고? 이건 기적이야.’

“아! 나도 한 번만 더 그 기적 같은 하루를 살고 싶어. 그래서 널 찾아온 거 알고 있지?”

‘네가 원한다는데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우리가 따뜻한 미소를 섞어 대답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우류는 ‘그럼 지금…….’이라고 혼잣말했다. 눈을 감고 무의식 속에서 우류와 대화하던 우리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 우류의 침실은 아늑하고 깊고 따뜻하며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휴식의 진정한 단맛을 깨우치게 되었다. 달빛도 스며들지 않는 깊음 속에 요람에 누운 듯 안정감 있는 흔들림이 그녀를 더욱 더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이미 아까부터 꿈을 꾸는 중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꿈속 존재와의 달콤하고 직관적인 대화를 하며 이상과 현실을 마음대로 넘나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류가 가진 또 다른 목적을 막을 수 없게 된 사실도 모른 채 완전히 잠에 취했다.

날이 밝아 와도 우리는 아침이 온 것을 알 수 없었다. 점차 의식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 자는 우류뿐이었다. 그는 새벽의 촉촉한 한기를 어서 느끼고 싶어서 잠자리에서 발버둥 치며 일어나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빌라가 세워져있는 언덕에 서서 아직 어스름 진 하늘가를 멀리 바라보니 흰곰팡이가 부스스하니 낀 것처럼 가장자리에만 몰려있는 구름이 슬금슬금 이동하고 있었다. 산 중턱쯤 올라온 해는 사방에 가득한 물기를 말리며 아침의 징조를 보였다. 우류는 맨발로 언덕길에 서있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며 지나가는 여자의 눈길을 느꼈다. 그는 후다닥 집으로 재빨리 돌아갔다. 집안 풍경은 이미 익숙했다. 우류는 물 한 컵으로 끼니를 때우고 몸을 씻고 옷을 입었다. 헐렁한 민소매는 입기에 가장 편안하고 단순했다. 그는 그 위에 허리에 고무줄이 들어간 원피스 치마를 입었다. 치마는 한 바퀴 돌면 평평하게 퍼져서 아랫도리가 그대로 보였다. 그는 속옷을 입고 싶지 않았지만 입어야 한다면 불편하게 조이는 것은 입고 싶지 않아서 고무줄이 들어간 반바지 하나만 속에 입었다. 민소매는 연한 회색이었고 원피스는 자잘한 무늬가 들어간 아주 옅은 분홍색이었다. 우류는 이제 몸에 뭔가를 덧입는 일이 싫증나서 손을 털었다.

집을 나서기 전, 얇은 헝겊으로 만든 낮은 스니커즈를 발에 꼭 끼워 신고 손에 물병 하나를 쥐었다. 모든 준비가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고 우류는 드디어 학교로 향했다.

아침부터 훈훈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며 우류는 흥분되는 기분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발을 구르듯이 흥겹게 박자를 타며 거리의 공기도 마음껏 마셨다.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는 것을 보고 우류도 미소로 화답했다. 우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맑은 영혼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찰랑이는 머릿결이 아침 해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고 말갛고 기다란 두 팔과 다리가 미끈하게 뻗은 모습에선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지럼증이 올 정도로 우류의 모습은 찬란했고,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촉촉한 풀잎과 따스한 바람과 메마른 땅이 공존하는 것을 보는 우류도 마냥 행복했다. 그는 팔을 하늘 높이 뻗어 올려 대지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려고 했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자 말할 수 없는 짜릿한 전율이 전신을 훑었다. 어깨를 자신 있게 흔들며 성큼성큼 강의실이 있는 건물로 가려고 언덕을 올랐다. 금세 배어나온 땀에서 특유의 체취가 맡아졌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는데 더 진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와 우류에게 닿았다. 우류는 냄새를 쫓아갔다. 건물 후면에 농구 골대 앞에 남학생들 몇이서 공을 튀기며 농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눈으로 전심을 다해 농구공을 쫓았다. 단 한 번도 공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자 곧 자기들 게임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하는 유일한 관객을 발견한 남학생들이 우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땀을 흥건하게 흘려 윗도리를 벗어놓고 놀던 남자 하나가 친구들과 수군거리더니 달려와 벤치에 구겨진 티셔츠를 도로 입으면서 우류에게 다가왔다.

 

“저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우류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남자의 진한 눈썹을 주시했다. 굉장히 숱이 많은 눈썹이었다. 남자는 그녀가 자기 눈썹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보는 것을 알아채고 호기롭게 받아쳤다.

 

“이 정도는 돼야 남자 아닙니까? 제 눈썹 멋있죠?”

 

우류가 긍정의 고갯짓을 해보이자 남자는 더욱 용기가 생겼다.

 

“번호가 좀 그러면 이름이나 과는 알려주실 수 있죠?”

 

남자의 말에 우류는 곰곰 생각에 빠졌다. 남자를 유심히 뜯어보며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 저울에 매달아보는 중이었다. 우류는 그가 괜찮은 사람이긴 하지만 어딘가 어리숙하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알기로 우리의 수업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는 남자가 소리치며 따라오는 것을 잽싸게 따돌리고 강의실로 뛰어갔다. 황망하게 서있는 남자를 버려두고 계단을 뛰어올라간 우류는 강의실 문을 냅다 활짝 열어젖히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벌써 과반수의 학생들이 자리에 앉아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우류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우류가 큰 소리를 내며 등장하지 않았어도 물론 그랬을 테지만……. 누군가는 고인 침이 책상에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입을 떠억 벌리고 우류를 바라보았다.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미칠 듯 궁금해 했다.

마침 중간 학년의 전공 수업이라서 승수와 건민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 건민은 관심 없는 강의를 일부러 우리와 만날 속셈으로 시간표에 집어넣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승수도 한 강의실에서 마주쳤는데 두 사람은 작정하고 따로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우류는 자주 보아 친근하게 여겨지는 건민이 손짓하며 부르는 소리에 먼저 반응했다. 건민은 MT에서 돌아온 뒤 방학 중에 우리와 시시때때로 만남을 가졌다. 방해세력이 없어진 만남은 공고하게 마르는 접착제가 되었다.

건민의 옆자리를 택한 우류를 곁눈으로 보고 승수는 속으로 ‘왜?’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게 질문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승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희망의 끈이 아직 남아서 승수를 흔들어댄 것은 분명했다. 우리는 승수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었다. 여행이 끝나면 말도 안 섞고 모른 척하며 지낼까봐 우리는 마음 졸이며 용기를 내어 승수에게 물었었고 승수는 그녀에게 믿음을 주었다. 확신을 주려고 포용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공공연하게 건민과의 돈독한 사이를 드러내는 한편, 자신과의 유대감은 비밀스럽게 간직하기만 했다. ‘여자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려고 포옹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승수는 그때의 일을 의미 있게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다른 사람과 스킨십을 스스럼없이 해오던 그였기에 때로 이성의 느낌이 아니어도 잘도 포옹이나 그 비슷한 것을 했었던 기억이 나서 금방 한 생각은 취소해야만 했다.

첫날 첫 시부터 수업을 하는 전공 교수 덕분에 승수는 그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건민은 그렇지 않을 거란 생각에 승수는 정말이지 강의에 집중할 수 없었다. 교수의 갑작스런 질문에도 평소처럼 핵심에 가까운 대답을 하지 못 해 그는 약간이지만 자괴감이 순간 일어나서 앉은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승수는 줄곧 어두운 표정으로 과묵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그는 웬만하면 수업 도중에 휴대폰을 확인하는 무례한 짓을 하지 않았다. 불현 듯 승수는 휴대폰을 꺼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만히 결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누구에게서 온 연락인지, 그것만 확인해야겠어.’ 승수는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한 통의 문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그의 동공이 커지고 심장이 세게 뛰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부러 세게 떨어댔다. ‘올 것이 왔구나!’

우리의 몸을 한 우류와 함께 앉아있던 건민이 뒤에서 승수를 주시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을 태연한 승수의 모습이 건민에게만 똑똑히 보였다. 책상에 올려놓은 건민의 손을 우류가 자기 무릎에 가져가 꼭 잡아주었다. 촉촉하고 따뜻한 손이었다. 건민은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은 손을 놓지 않았다.

강의가 모두 끝나고 승수는 저를 부르는 후배의 말을 못 듣고 서둘러 가방을 메고 강의실을 튀어나갔다. 건민은 우류의 손을 잡고 천천히 복도로 나왔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승수가 흘깃 눈을 들어 위를 보았다. 건민이 내려오면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따 보자.” 건민의 낮은 음성이 빗물처럼 승수의 이마에로 떨어졌다. “……그래.” 승수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을 느꼈고, 거스를 수 없는 명령에 대답하듯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수긍했다.

승수가 가버리고 난 후 건민이 다정하게 우류에게 말했다. “너도 같이 만나자. 나올 수 있지?” 우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건민이 말을 이었다. “오늘 할 거야. 그때 하지 못 했던 일.” 건민이 곰곰 생각에 빠진 투로 말했다. 우류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왠지 복잡하고 서글픈 모습으로 옆에 선 건민이 우류는 낯설게 느껴졌다.

그들의 밤이 찾아올수록 우류의 애타는 마음이 진해져갔다. 예상할 수 없는 혼동된 세계가 우류의 마음에 꼭 들어와 헤집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우류는 밤을 기다렸지만 내일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어항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깊은 잠에 잠겨있는 우리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평온해보였다. ‘다 널 위해서야.’ 우류가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자극했지만 우리는 대답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본능만이 날선 검처럼 빛이 나고 곧 시계 초침 소리에 맞춰 우류는 자리를 떠났다. 달 밝은 밤, 어느 때보다 우류는 검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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