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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소설(14)

하나와 둘

 

하나가 연애를 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난 뭐하고 있냐?’란 생각이 뜨문뜨문 들어왔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그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렸다. 그로부터 하나는 매일같이 자기 동지 만들기에 급급해하며 남자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회유를 했다. 미술학원에서 만난 다른 학교의 남자애들을 여럿 많이 알고 있는지 이런 애, 저런 애 사진도 보여주었다. 하나가 들이민 사진을 볼 때면 나는 두 가지 기준으로 남자애들을 분류하게 되었다. 첫째 기준은 승현이 축에 낄만한지, 아니면 승현이에 비해 얼마나 부족한지 하는 거랑 둘째는 민석이보다 얼마나 나은지, 민석이보다도 못한 수준인지였다.

민석이는 작년에 나와 사귀는 줄로 착각했던 주환이와 금세 친구가 되었다. 지금까지 어울려 다니는 친구 중에 주환이 같은 애는 없었던 걸로 보았는데, 둘이 친해지자 다른 어떤 남자애들보다 더 친밀한 사이로 발전했다.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했는데, 민석이가 나한테 부담스럽게 굴지만 않았으면 우리도 저 정도로 친해지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종종 사람 간을 보는 짓을 해대기 때문에 그런 사이가 되기에는 멀어보였다.

나는 점점 더 조급해졌다. 수능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아니, 수능 때문이기도 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더 많았으면 어떻게든 승현이와 친해질 수 있는 방도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는 갈수록 아득히 멀고 먼 딴 세상 사람이 되어갔다.

시인이가 우리 교실로 온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승현이가 시인이네 교실로 찾아가는 걸 보았다. 나는 승현이의 자취를 찾아 교실을 떠나 복도를 배회하며 핑계 김에 컵을 들고 나가 시인이네 교실을 지나가며 곁눈질을 했다. 그럴 때마다 대체로 승현이는 시인이와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잘 어울렸다. 그게 굉장히 김빠지는 요소였다. 뭐랄까, 승현이는 좀 다를 줄 알았다. 그러니까 보통 이목 끌기를 좋아하는 남자애들이 그러듯이 매일같이 사귀는 사이끼리 붙어 다니며 자기들의 관계를 광고하고 다닌다는 게 승현이하고는 어울리지 않았다. 왜 승현이는 시인이를 택했을까? 왜 하필 시인이여야만 했을까? 시인이는 나완 너무 다른 유형이었다. 조급해 해봤자 결국 좌절로 끝맺을 이야기 속에 나는 왜 이리도 깊이 들어 와버렸을까? 이제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원하지 않아도 시간이 다가오면 수능을 치러야만 하고, 어떤 실패의 잔이 되었든 쓰디쓴 그 잔을 마셔야만 한다.

 

“이승민, 너 이 노래 알아?”

뒷자리에서 민석이와 얘기하던 주환이가 내 등에다 대고 말을 던졌다. 주환이는 한 쪽 이어폰을 내게 건넸다. 나머지 한 쪽 줄이 어디에 꽂혀있는지 확인하지도 못하고 다짜고짜 손에 이어폰을 쥐어주며 얼른 들어보라고 주환이가 재촉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돌아앉아 이어폰을 왼쪽 귀에 꽂으니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의자 등받이에 한껏 기대어 앉은 민석이의 오른쪽 귀에도 이어폰이 걸려있었다. “이거 그거 아냐? 중국 영화에 나왔던 것 같은데….” 귀에서 이어폰을 빼며 대답했다. “맞아. 중경삼림. 이게 원곡이야.” “어떻게 듣자마자 알아?” 주환이의 대답에 이어 김민석이 물었다. “집에 이 영화 CD있어.” “나 그 영화 못 봤는데! 우리 보러 가자.” 민석이가 주환이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이승민이 오라고 그래야지 우리가 가는 게 어디 있어?” 내가 콧방귀를 뀌기도 전에 상식이 통하는 주환이가 나섰다. 하지만 주환이 말에는 무언가 뼈가 있었다. 보고 싶기는 하지만 내가 초대하지 않아서 볼 수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주환이, 빌려 줄까? 어차피 아빠는….” “우리 집 CD 드라이브 망가져서 안 되는데.” “아…….” 이상하게도 주환이에게는 호의를 베풀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겼다. “정 보고 싶으면 보여줄 수 있긴 한데…….” 그 호의란 동정심 같은 게 아니라 일종의 강한 기운이 양심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거였다. 착한 사람에게 못된 짓을 하면 훨씬 더 큰 죄책감이 드는 거랑 비슷했다.

중학교 1학년 이후로 집에 친구를 초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우리가 얘기하는 걸 지나가다가 들은 희주까지 와서 셋이서 무슨 비밀 얘기를 했는지 실토하라고 집착을 부리는 바람에 한 사람이 더 보태졌다. 희주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비밀이라고 신신당부했다. 세 사람은 눈에 띄게 들떠 얼굴에 샛노란 화색이 돌았다. 혹시나 하고 하나에게도 귀띔해주었는데 역시나, 주말에는 남자친구와 놀러가기로 해서 아쉽다는 말을 아쉬운 기색 없이 전했다.

해가 똑 떨어지고 쌀쌀한 바람이 밤공기를 가르며 창으로 들이닥쳤다. 열어둔 창문을 닫으니 창에 내 얼굴이 반사되어 보였다. 책상에 코를 박고 책들 사이에 파묻힌 반 친구들을 배경으로 나는 우두커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민석이는 진학 상담을 받으러 교무실 옆 상담실에 올라가있었다. 교정에는 가로등 몇 개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고 그 중에 나무 밑에 있는 가로등 하나는 깜빡거리며 수명이 다해가는 모습이었다. 불이 ‘깜빡깜빡’하는 박자에 따라 심장이 작게 요동쳤다.

정민이가 일요일 아침에 집에 가자고 했기 때문에 일단은 토요일에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독서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엄마는 거의 매주 토요일 저녁에 집에 돌아오시니까 민석이네 애들은 정오쯤에 오게 해서 영화만 보여주고 밖에서 놀자고 할까 생각 중이다. 어쩌면 세 친구는 영화가 별로 재미없다고 하면서 그 전에 먼저 가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집에 손님이 오면 엄마는 작은 거라도 대접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그러니 당장 예산을 새로 짜야할 것 같다. 정민이한테 비상금이라도 빌려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민석이 자리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내가 긴장하고 있는 게 들킬까봐 펜을 들어 줄을 그으며 읽는 시늉을 했다. 지문에서 별로 중요치 않은 문장을 줄로 긋다가 도로 지우개로 지우고 문제에 집중해보았다. ‘문제가 뭐였지?’ 한 다섯 번은 읽었는데 자꾸 딴 생각이 들어와 단어 한 개도 기억나지가 않았다.

‘톡’ 민석이가 등을 한 번 두드려 나를 불렀다. 하도 툭하면 등을 치며 불러 대서 이골이 나던 차라 잔뜩 인상을 구기고 뒤돌아보았다. 뒤에서 날 부른 사람은 민석이가 아니라 승현이였다.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 근육이 삽시간에 사르르 풀려버렸다. 승현이는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아서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뭐에 홀린 듯 창 쪽으로 몸을 돌려 승현이가 가리킨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저 멀리서 붉은색, 노란색 불꽃이 공중에서 강렬한 빛을 쏘며 찰나의 순간 하늘에 붙박였다. 나는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광경을 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교실을 휘 둘러보았다. 아무도 창 밖에는 관심들이 없었다. 경탄하는 얼굴로 승현이를 보니 그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상했다. 우리는 어색한 사이가 아니었었나? 나만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지 승현이의 태도는 무척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승현이와 가까이에 있는 게 부적절한 일로 여겨졌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는 그의 여자 친구인 시인이와 친한 친구였기에 더 그랬다. 그와 마주보고 있어서 행복했고, 한편으론 불안했다. 이런 일은 일시적이고 단회적일 뿐이었다. 승현이가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한, 내가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영원히 선택권은 승현이에게만 있었다.

개학식 날 버스에서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지는 나를 승현이가 나서서 도와준 거였으면 좋겠다. 시인이가 승현이한테 괜찮으냐고 물은 것을 잘못 알아들은 걸로 단박에 의기소침해져서 민망함을 떨치려고 재빨리 종결지은 문제였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을 잠재우지는 못 했다. 어떻게 맨 앞자리에 서있던 그가 그 잠깐 사이에 넘어져있는 내 몸에 깔릴 수가 있냐는 말이다. 버스에는 우리 학교 학생들과 다른 학교 중고등학생들로 붐볐고 사람들의 어깨와 어깨가 빈틈없이 밀착되어 있어서 일부러 밀어내지 않고는 헤쳐 나오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같은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기는 했어도 나처럼 서두를 필요가 두 사람에게는 없었을 터였다. 그날 곁눈으로 보았던 상황을 기억하려하면 할수록 의문은 짙어졌다. 승현이가 그렇게 급하게 뛰쳐나온 이유는 나 때문이었을까?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면 분명 그에 걸맞은 행동이 다음에 이어졌어야 했는데, 나와 함께 버스 바닥을 나뒹굴고 나서는 그저 시인이와 유유히 학교로 향해간 게 다였다.

상담을 다 받은 민석이가 교실로 돌아왔다. 승현이는 민석이가 다가오자 책상에 펼쳐놓았던 책을 손바닥에 얹어주고 자기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민석이는 웃음과 짜증이 뒤섞인 난생 처음 보는 희한한 표정을 지으며 책을 내려놓고 승현이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승현이도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주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 자리에서 하루만 공부해. 오늘은 내가 여기서 할게.” 자존심 상해할까봐 나는 모른 척하며 앞으로 돌아앉았다. 직감적으로 두 남자애의 눈에서 튀어나오는 빛이 예사로운 게 아님을 느꼈다. 누구든지 한 명이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싸움이 날 판이었다. ‘민석아, 그래도 상대가 승현인데 설마….’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사람이 정도가 있기 마련이었다. 누군가 흘깃 뒤돌아보는 게 느껴져 살짝 고개를 들었다. 세 번째 줄에서 가운데 앉아있는 주환이가 목만 조금 돌려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일부러 귀 위로 펜을 흔들며 녀석의 시선을 끌었다. 금방 알아채고 이쪽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눈짓으로 두 사람을 말려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주환이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은 민석이가 승현이에게 책을 가져다주고 본인은 승현이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민석이가 승현이 자리에 앉자 대각선 뒤에 앉은 연정이, 그 열렬한 승현이의 추종자가 어찌된 영문인지 알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승현이가 책을 펴는 소리가 매우 또렷하게 들렸다. 폭죽은 다 터뜨렸는지 어쨌는지 보려고 슬며시 창밖을 보았다. 유리창에는 온통 새까만 어둠만 묻어 있었다. 그리고 하얀 얼굴 두 개가 비쳐보였다. 고개를 더 꺾어 창밖을 보는 승현이를 쳐다보았다. 승현이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장난기가 서려있었다. 내가 숨죽여 웃자 승현이도 입을 길게 찢으며 하얗고 고른 치아를 환히 드러내보였다. 아마도 이게 승현이 방식의 사과법, 또는 화해법인 것 같다. 우리가 서먹해진 이유는 중간에 낀 시인이나 자기의 사랑싸움에 휘말리게 한 건희에게서 비롯한 거라기 보단 승현이와 내가 서로를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승현이는 초등학생 때 가진 나에 대한 이미지만으로 친근감을 갖고 대했지만 고등학생이 된 나에 대해서는 더 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가 아직 말해주지 않아서 우리가 얼마나 친했는지도 나는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승현이 혼자만 무턱대고 친한 척해도 나는 그럴 수 있는 사정이 아니었다. 그에게 나는 단순한 친구일 뿐이었으나 나에게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불꽃놀이는 끝이 났다. 나와 승현이도 각자의 본분으로 돌아갔다.

앞자리 윤미가 풀고 있던 문제집을 가지고 내 자리로 돌아앉더니 그 문제집에 뭔가를 끄적였다. ‘민석이 어디 감?’ 창가 쪽 자리는 지정석 제도를 도입해서 벌써 두 달째 윤미와 나는 앞뒤로 가까이에 있었지만 이따금씩 수업이나 공지사항을 물어볼 때나 말을 섞었다. 서먹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평이한 관계를 이때껏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윤미의 관심사가 민석이의 행방이 아닐 거라고 단정 지었다. ‘한승현 자리에.’ 윤미가 끄적거린 글 밑에 답변을 달았다. ‘왜 바꿈?’ 윤미의 호기심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박주환은 왜 쳐다봄? 누구 싸움?’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하고 최종적으로는 ‘나도 몰라!’라고 발뺌을 해버렸다. 자기가 한 짓이 새삼 민망했던지 윤미는 혹시 이 문제 아느냐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곤 중간고사 시험범위에 들어가 있는 로그함수 그래프 문제를 나한테 보여주었다. 내가 작게 대답했다. “나 수포자야.” 윤미는 과장되게 놀라며 “수학 잘하게 생겼는데!” 라고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서야 제 책상으로 돌아앉았다.

 

야자가 끝나는 마지막 종이 울렸다. 다들 기지개를 켜고 자던 친구를 깨우거나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있을 은경이를 눈으로 찾았다. 화장실에 간 건지 자리가 비어있었다. 승현이는 민석이가 책을 들고 자리로 돌아오자 “야, 여기 자리 좋다. 담에는 내가 예약해놓는다.”고 말했다. 김민석은 별 대꾸도 하지 않고 책을 서랍에 집어넣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주환이가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왔다. 승현이는 주환이에게 잘 가라고 인사한 뒤 가방을 싸러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말소리를 듣고 민석이가 뒤에 서있는 주환이에게 말했다. “주환이 먼저 가. 버스 늦잖아.” “어, 나 먼저 간다. 내일 이승민 네서 보는 거지?” 내가 되물었다. “진짜 올 거야?” “아까 보러 가도 된다며.” “어, 되긴 되는데….” 주환이는 시계를 보더니 많이 늦었는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황급히 달려 나갔다. “되긴 되는데 왜?” 민석이가 가방에 필통을 넣으며 물었다. “진짜 오는 건가 해서.” 김민석은 피식 웃기만 하고 딴 말을 꺼냈다.

“너 근데 조은경 기다리는 거야?”

“어. 왜?”

“걔 아까 갔는데, 학원 간다고.”

“진짜? 나 그럼 가야겠다.”

“같이 가. 나도 독서실 갈 거야.”

나는 꾸물거리는 민석이를 기다려주지 않고 복도로 나갔다. 다른 반 교실 앞에서 고래고래 자기 친구 이름을 부르는 희주가 나를 보더니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12시 맞지?” “너 우리 집 알아?” “문자로 찍어줘. 나 간다. 사랑해, 이승민!” 난데없는 사랑 고백과 함께 희주는 요란스럽게 친구 무리와 떠나갔다. “이승민, 같이 가!” 민석이가 헐레벌떡 뒤쫓아 왔다. “아, 좀 기다려주지!” “또 삐지면 같이 안 간다.” 내 말에 민석이는 금방 헤헤거렸다.

 

그렇게 해서 나는 매일의 하교를 민석이와 동행하게 되었다. 때로는 내가 들고 있는 등짝만한 수능 기출문제집을 억지로 빼앗아 들어주기도 했다.

“너 원래 자전거 타고 다니지 않았어?”

“윽! 내 아픈 상처를…!”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민석이가 밉살스러웠다. 제발 정상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건가? 내가 뚱한 반응을 보이자 알아서 설명했다. 축약하면 자전거를 벌써 두 대나 도둑맞았다는 얘기였다. 그 짧은 이야기를 독서실 가는 내내 길고도 길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걸 듣느라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말하다 말고 “내 말 듣고 있어?”란 말을 중간에 몇 번이나 하는지 이야기 중간 중간 민석이는 나에게 호되게 구박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이야기가 끝은 있는 거야?” “야야, 가만있어 봐. 들어봐 봐.” 독서실에 돌아가서 씻고 자리에 앉아서까지도 쟁쟁하게 남아있는 환청이 가시질 않았다.

자기 전에 정민이를 식당에 불러서 내일 집에 갔다 올 테니 알고 있으라고 얘기해주었다. “언니, 나 아까 석식 시간에 교문 앞에서 하나 언니 봤다. 근데 내 친구의 친구랑 하나 언니랑 손잡고 있더라.” 그동안 시간이 안 맞아서 정민이와 학교 얘기로 수다를 떨지 못한 지 꽤 되었었다. “나중에 얘기해줄게. 나 다른 할 말 또 있어.” 정민이는 기대에 차 눈을 빛냈다. “아, 맞다. 나도 할 말 많아.” “암튼 가서 공부하고 내일 얘기해.” 우리에게 대화할 시간은 충분했다. 다음을 기약하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질 거고, 그러면 우리의 수다 만찬은 더욱 풍성해진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천천히 준비를 했는데도 단잠에 빠져있는 정민이를 내려다보다가 책상에 펼쳐놓은 문제집에 쪽지를 남기기로 했다. ‘집에 갔다 오후에 올게.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쪽지를 남기고 나가려다가 이제 막 세수를 하고 온 은경이와 마주쳤다. “은경이 학원 다녀?” 은경이가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영어 학원. 깜빡하고 말 못했네.” “그럼 맨날 다녀?” “어, 나 이제 죽었어. 학원 숙제도 엄청 많아.”

은경이의 신세 한탄을 몇 마디 들어주고 밖으로 나섰다. 날씨는 화창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맑았다. 집에서 먹을 만한 간식거리를 사려고 근처 마트에 들렀다. 내가 좋아하는 걸 사야할지,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게 뭘까 생각하다 사뭇 생활고를 염려하는 여느 주부가 된 것 같아 얕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과자 진열대에서 몇 개를 골라 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민석이에게서 온 전화였다. <바로 옆집 살면서 왜 같이 안 갔어!> “나 요 앞에 마트야. 올 거면 빨리 오든가.” 민석이는 후다닥 전화를 끊었다. 대강 고르고 계산대로 가자 마트 입구에 주환이와 민석이가 들어오려는 게 보였다.

“장희주는 어디 살아?”

“희주는 하천 다리 건너서 있는 아파트 산대. 우리 집 반대편.”

손에 든 봉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더니 매주 보던 사람처럼 평범하게 물어보는 주환이에게 대답해주었다. “그럼 좀 걸리겠다.” 인도 턱을 오르며 주환이가 얌전히 말했다.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사실 나와 별로 친하지도 않은 희주가 구태여 오기는 할까 미심쩍었다.

 

내 느낌에 영화는 작은 도구에 불과했다. 우리는 그저 가당한 이유만 있다면 한시름 내려놓고 어울려 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잖아도 주말이 코앞이었고, 중간고사까지는 며칠 여유가 남아있었다. 오히려 시험을 보고나서는 차례로 발표되는 점수와 성적 덕분에 놀 의욕이 사라지곤 했다.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집안은 전보다 더 냉랭한 기운이 돌았다. 모처럼 주일이 아닌 날 돌아왔는데, 사람 살지 않는 빈집에 온 것처럼 공기마저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문을 열어주자 이미 아무도 없다고 일렀는데도 민석이는 큰소리로 “계세요!” 하고 인기척을 냈다. 덩달아 나도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주환이가 내가 사온 음식물이 들어있는 봉투를 주방에 내려놓았다. 나는 우선 집안을 환기시키려고 베란다 창문과 집안 창문을 전부 열어두었다.

“이승민, 여기 네 방이야?”

민석이가 정확하게 내 방문을 열면서 소리쳐 물었다. 나는 안방 찬장에서 CD를 찾으며 대강 “어!” 하고 대답해주었다. 베란다로 바깥 풍경을 구경하던 주환이도 기웃거리며 민석이를 따라 내 방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 초인종이 울리며 희주가 우렁차게 내 이름을 불렀다. 문을 열어주러 나가면서 보니 그새 민석이는 정민이 자리에 있는 컴퓨터를 틀고 있었다. 주환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뭘 잘못한 사람처럼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빨리 열어!” 희주의 재촉에 맨발로 뛰쳐나가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희주는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막무가내로 내 몸을 밀치며 들어왔다. “아! 팔 아파 죽겠어! 승질 나!” “뭐 가져 온 거야?” “장주, 왔냐?” 주환이가 나와서 희주에게 인사했다. 희주는 씩씩거리며 내 방으로 들어가 반가운 시늉도 않는 민석이에게 다짜고짜 따져댔다. “넌 누나가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냐?” 민석이는 희주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아, 너 왜 왔어!”하고 짜증을 부렸다.

“나쁜 새끼! 이승민, 울 엄마가 친구 집 간다니까 막 이런 거 싸주신다.”

“이게 다 뭔데?”

“제사 때 남은 과일이랑 닭강정 해주셨어. 울 엄마 짱이지?”

“너 혼자 힘들었겠다.”

주환이가 팔짱을 끼고 서서 희주를 걱정해주었다. “완전 힘들었지! 근데 저 새낀 나와 보지도 않고 뭐하냐?” “어, CD 찾았네.” 내 손에 들린 CD를 주환이가 발견했다.

민석이가 영화를 트는 동안 나는 접시에 음식을 담고 컵에 음료를 따라서 그럴듯해 보이는 손님상을 차려가지고 방으로 가져갔다. 내가 막 방으로 들어서자 영화에서는 구식의 총성이 울렸다. 희주는 내 의자에 앉아 책상에 다리를 길게 올려놓고 있었고, 주환이는 침대에 등을 기대어 바닥에 앉아있었다. 비좁은 방에 네 사람이나 들어와 있어 이미 포화상태였다. 나는 바닥에 조그만 상을 내려놓고 침대 위로 풀썩 뛰어올라가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아빠가 집을 자주 비우던 중학생 때에는 특별한 놀 거리가 없으면 안방 찬장에 있는 영화 CD를 아무거나 골라 와서 조용히 틀어보곤 했다. 간혹 어떤 영화는 빨간 글자로 ‘19세 미만 관람 불가’라고 쓰여 있었다. ‘19세 미만 관람 불가’란 말은 이 영화에 더 특별한 볼거리와 재미있는 장면이 풍부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중경삼림>은 그런 빨간 글씨가 없었지만 유독 애착이 가는 영화였다. 거기에 나온 짧은 머리 여자처럼 보이고 싶어서 한동안은 ‘california dreaming’만 주구장창 틀어놓고 털털한 말투를 따라한 적도 있었다. 그 무렵에 만났던 게 민석이인데, 그래서인지 그 영화를 보거나 영화의 삽입곡을 듣다 보면 민석이와 여차저차 통성명을 한 후 알고 지내게 된 14살 때의 여름이 떠올랐다. 다만 그 장면만이 아니라 그때의 분위기와 모래 냄새, 엎드려 있으면 맡게 되는 책상의 나무 냄새, 그 시간쯤에 보게 되는 하늘의 색, 오후 하굣길에 듣게 되는 왁자지껄한 소음이 전부 바로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게 생각났다. 나는 그래서 영화의 두 가지 에피소드 중에 ‘경찰 633’과 그의 집에 몰래 침입하는 ‘페이’가 나오는 두 번째 내용을 더 좋아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의 자유분방함을 동경하면서 나는 늘 망상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희주는 잘생긴 ‘경찰 223’이 나오는 부분이 더 재미있다고 했다. 그나저나 저 여자는 언제쯤 선글라스를 벗는 거냐고 성화를 내면서도 남자만 나왔다 하면 “잘생겼다!”고 소리를 질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주환이와 내가 아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동시에 “어!”하고 화면을 손가락질했다. 민석이는 영화를 보러 온 건지 먹으러 온 건지 거의 혼자서 닭강정을 거덜 내고는 또 음식을 찾았다. 희주가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영화 한 편 보니까 되게 기운 빠진다. 우리 노래방 갈래?”

민석이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먼저 햄버거를 먹고 근처 아무 노래방에 터를 잡았다. 방마다 우리 또래로 보이는 애들이 여럿이 들어가서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꽥꽥 질러대고 있었다. 우리는 구석에 있는 방으로 인도 받았는데 건너편에 있는 애들이 한눈에 봐도 껄렁해보였다. 걸걸한 목소리로 희주가 “야, 아까 걔네 봤냐? 사복 입고 담배 피면 누가 모를 줄 아나, 참나!” 하고 분개했다.

“난 노래 안 할 거야.”

들어가자마자 마이크를 잡아챈 희주가 뒤돌아보며 “닥쳐. 너도 시킬 거니까.” 하고 단박에 내 선언을 무시했다. “아냐. 나 진짜 하기 싫어.” 징징대는 소리를 해도 아랑곳없이 희주는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곧장 구석 자리에 앉아 소파에 있던 쿠션을 껴안고 앉아있는 민석이도 바보처럼 실실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주환이야 누구나 다 아는 우리 학교 공식 가수였다. 노래는 젬병이고, 더구나 춤은 나와 아무런 공통분모가 없는 분야였다. 희주 혼자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허리를 흔들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헙! 헙!”하는 이상한 추임새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억지로 손을 잡아당기고 껴안아서 가운데에 세우려는 희주와 몸싸움을 하는 통에 아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런 우리를 주환이와 민석이는 그저 ‘허허’ 보고만 있었다. 결국은 희주와 한 소절씩 나눠 부르며 가짜로 신이 난 척 놀아줄 수밖에 없었다.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기가 싫으면서도 노래방에 따라온 건 주환이의 노래가 또 듣고 싶어서였다. 가수면 원래 다 그런 건지, 명창의 노래는 매일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주환이는 지금까지 TV에 나온 가수들과는 다른 특별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고, 장르도 다양했다. 특히 모던 록이라고 했는지, 브릿팝이라고 했는지 주환이가 가르쳐준 영국 음악 장르가 있는데 그쪽 노래를 들려줄 때가 훨씬 멋져보였다. 그래서 노래방에 온 김에 주환이에게 모던 록을 불러달라고 주문했더니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는 따로 있어.” 그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노래방에서 1시간만 놀기로 했었는데, 주인아저씨가 시간이 다 될 즈음이면 꼬박꼬박 10분씩 서비스를 주는 바람에 목이 쉬어서 더 이상 부르지 못 할 상태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길거리로 나와 상쾌한 바람을 쐬는 동안 희주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저만치로 자리를 옮겼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함을 지르며 한참 말다툼을 하더니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와서 “아, 짜증나! 과외 오늘만 짼다니까 되게 뭐라 그래! 진짜 가기 싫어.” 불평을 늘어놓았다. 우리 셋은 그런 희주를 마뜩찮은 눈으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팔짱만 끼고 지켜보았다. 딱히 가지 말라고 붙잡을 만큼 친한 것도 아니고, 과외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알았다면 진작 집에 보내주었을 거였다. 희주는 발로 바닥을 탁탁 차며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리다가 버스 올 때가 됐는지 자기만 빼고 재밌게 놀면 죽일 거라는 협박을 남긴 채 느린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벌써 5시 반이야.”

주환이가 시계를 들여다보고 말했다. 해가 길어져서 대낮같이 밝아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한 5시쯤 독서실에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두 사람은 헤어질 마음이 아직 안 드는지 상가가 늘어선 골목 귀퉁이에 서서 게임 얘기를 하며 흰소리만 늘어놓았다.

“영화는 재밌었어?”

잘 모르는 대화를 싹둑 잘라내고 말을 꺼냈다. 주환이는 괜찮았다고 말했고 민석이는 재미있었다고 대답했다.

“넌 보지도 않고 먹기만 했잖아.”

“내가? 나 영화 보느라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어!”

“퍽이나.”

주환이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손에 들고 있는 키홀더를 팽글팽글 돌리고 있는 게 재미나 보였다.

“주환이네 집에 갈래?”

내가 키홀더를 쳐다보고 있는 걸 알았는지 민석이가 말했다.

“집에 안 가?”

“벌써 왜? 더 놀다가 가.”

갈 마음이 요만큼도 없는 민석이는 제쳐두고 주환이의 동조를 얻으려고 물었다.

“박주환, 집에 가고 싶지 않아?”

“당연히 가기 싫지. 우리 집 앞에 하천 산책로 있는데 거기나 갈래?”

주환이의 새로운 제안을 듣고 민석이가 기대에 찬 눈으로 내 입만 바라보았다.

“나 이제 가봐야 돼.”

매몰차보여도 종일 독서실에서 기다렸을 정민이가 떠올라서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서 핑핑 돌아가던 키홀더가 주환이의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지금 꽃 많이 펴서 풍경 되게 좋은데…. 나도 그럼 집에나 가야겠다.”

민석이는 주환이가 집에 간다고 하니까 얌전히 보내주더니 나와 독서실로 돌아가는 길을 온통 불평, 불만으로 물들였다. 동생이 애도 아닌데 꼭 이렇게까지 해줘야 하는 거냐, 이왕 나온 거 근처만 좀 구경하고 갈 수도 있는 거 아니냐, 내가 이렇게 애원하고 부탁하는데 너무 치사한 거 아니냐, 하도 떠들어대서 한쪽 귀가 먹먹했다.

“아, 알았다고! 그럼 갔다가 언제 올 건데? 저녁은 나 독서실에서 먹을 거야. 오늘 돈 너무 많이 썼어.”

“금방 갔다 오면 되잖아.”

내가 왜 민석이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무시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질척거리고 못살게 구는 습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가만 보면 나는 민석이의 상대가 안 되었다. 마침내는 녀석이 해달라는 대로 해줘야 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맞춰줘야 했다. 떼쟁이에다가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 없는 인물이란 이처럼 매우 곤란하고 위험한 법이었다.

주환이는 집에 보내놓고 우리끼리만 가려니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속없는 팔푼이 녀석은 꽃 축제가 한창인 산책로 입구에서 솜사탕을 사가지고 와서 부산스럽게 떠들었다. 잠깐 아무 생각 없이 하자는 대로 이리저리 휩쓸리는 바람에 나는 순진한 몰골로 솜사탕을 뜯어먹으며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이 길을 다니는 남녀들이 전부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야말로 얼마나 둔하고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설마 다른 사람들 눈에 나와 민석이가 그렇고 그런 사이로 보일 리는 없을 것이다. 불시에 찾아온 깨달음 때문에 점점 얼굴이 화끈거리고 옆에 찰싹 붙어서 걷고 있는 김민석은 천하에 둘도 없는 파렴치한으로 여겨졌다. 어쩌자고 이런 데를 단둘이 다녀오자고 제안할 수가 있지? 아무리 떨어져 걸으려고 길가로 바짝 붙어 서도 민석이는 악착같이 내 옆자리를 사수했다. 짜증이 극에 달해 있는데 민석이가 입을 열었다.

“야, 근데 걔 누구지? 황연정? 걔 한승현 좋아하는 거 맞지?”

녀석은 또 엉뚱한 말을 꺼내었다. 나는 1학년 때 종종 그러던 것처럼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의 질긴 인연을 거듭 언급하며 각종 추억거리들, 둘만이 공감할 수 있는 기억 따위를 늘어놓을까봐 벌써 심기가 불편하던 차였다. 그게 아니면 자기가 나를 얼마나 잘해주었으며 세상에 자기 같은 사람이 별로 흔하지가 않다는 자화자찬으로 귀를 학대시키는 얘깃거리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다.

“갑자기 뭔 말이야?”

“아니야? 근데 걔는 여친 있는 것 같던데.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임자 있는 사람 건드리는 사람은 좀 아닌 것 같아.”

“연정이가 언제 건드렸어? 그냥 좋아만 하는 게 왜 건드리는 거야?”

민석이의 논리는 나를 자극했다.

“다른 남자들은 차별 대우하면서 지가 좋아하는 애만 잘해주잖아.”

“차별 대우?”

민석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지만 나도 다 알고 있는 얘기였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반쯤 장난 식으로, 하나의 유머코드로 보았기 때문에 누가 실제로 연정이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줄은 생각지도 못 했다. 역시 민석이는 여전했다. 남들보다 유달리 피해의식이 강한 걸까? 그게 아니면…….

“너 황연정 좋아해?”

“그렇게 못생긴 앨? 줘도 안 가져.”

“네 얼굴 좀 보면서 말해라.”

“뭐? 내가 못생겼다고? 나 정도면…!”

“OK. 거기까지.”

정말 말 같지도 않은 허세는 적당히 부려주길 바란다. 연정이는 그다지 못생기지도, 예쁘지도 않은 딱 중간의 평범한 생김새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애들에 비해 화장도 거의 안 하는 편이어서 맨 얼굴인 점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거기에 민석이를 비교한다고 하면 연정이가 아주 기가 막혀서 펄쩍 뛸 노릇이었다.

“근데 너 더 나쁜 놈은 어떤 놈인 줄 아냐? 여친도 있으면서 다른 여자 꼬시고 다니는 놈들이야. 네가 남자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넌 특히 조심해야 된다.”

이미 나의 궤도는 민석이의 행성에서 이탈해 있었다. 저 혼자 끝도 없이 나불대라지. 자기가 뭘 얼마나 잘 안다고 훈수 질까지 하는지, 가만히 두면 입으로 나라라도 세울 태세였다.

 

정민이와 나는 엄마가 맛있는 저녁을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내가 독서실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해준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으며 독서실에서 지내는 얘기도 해주고, 엄마도 집 근처에서 일을 알아볼까 생각 중이라는 말도 들었다. 엄마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건 다 우리를 위해서 하는 일일 테니까 나는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엄마를 대신해 정민이가 설거지를 하고 나는 상을 치웠다. 엄마는 베란다에 있는 건조대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그럼 하나언니는 걔랑 사귀는 거야?”

앞뒤 맥락 없이 정민이가 말을 꺼냈다.

그게 다 하나가 적극적으로 남자애에게 들이대서 얻어낸 결과물이라고 보고하자 내 생각과 똑같이 정민이도 “겨우 그때 한 번 보고선? 말도 안 돼!” 라고 했다.

정민이의 할말은 자기네 반에 저를 좋아하는 것 같은 남자애가 있다는 소리였다. “혹시 네 옆에서 장난치던 애?” “어! 맞아! 언니도 봤었지, 참! 걔 때문에 언니 심정 100% 이해가. 근데 언니는 김민석이랑 잘 다니더라? 엄청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엄마가 빨래를 다 널고 와서 무슨 얘기들을 하냐고 물었다. 우리는 배시시 웃으며 “엄만 몰라도 돼.” 하고 방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엄마는 “참나!” 그러더니 이어서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방으로 돌아와 낮에 친구들을 집에 들였던 내용은 쏙 빼고 밖에서 놀았던 얘기를 정민이에게 전해주었다. 그런 다음에 어쩌다보니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하천 꽃 축제장까지 민석이와 다녀오게 되었다고 말해주면서 아까의 일을 곰곰 떠올렸다.

민석이와 단둘이 있을 때 느끼게 되는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 이성을 사귄다는 건 그런 느낌일까? 민석이가 아니라 승현이었어도 그랬을까? 하나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단 몇 번밖에 본 적 없는 남자애를, 그 애가 어떤 애인지도 모르면서 좋아하고 고백하고 사귀기까지, 하나에게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불현 듯 승현이가 시인이와 사귀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금 이 기분으로라면 승현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뿌리쳐버릴 것 같았다. 단지 낯설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이성과의 교제라는 건 내가 혼자 상상하는 것만큼 기분 좋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너무 어색하고 소름이 끼쳐서 승현이라 할지라도 정이 떨어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그냥 혼자인 지금을 만끽해야겠다고 방에 나란히 누운 정민이에게 내 생각을 전했다.

 

“언니, 그게 왜 그런 줄 알아? 보통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그렇대. 자기를 굉장히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자기를 좋아해주니까 그 사람은 더 볼품없어 보이는 거지. 언니는 근데 사춘기가 너무 늦게 온 거야. 보통 사춘기인 애들이 자기혐오를 한다고 그러더라. 난 중2 때 진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찌질이 같고 못난이 같았거든. 근데 이제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 그랬더니 정말 세상이 달라 보여. 다들 날 무시하고 싫어한다고 생각했거든? 그게 아니더라.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자신 있어지니까 남들이 나를 대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는 거야. 언니도 이제 그만 자기를 사랑해야 해. 어떻게 하냐고? 방법이 한 가지 있어. 내가 자주 쓰던 방법인데, 엄마를 생각해봐. 엄마가 언니를 사랑하지? 엄마는 죽을 때까지 내 편이잖아. 죽을 때까지 날 사랑해줄 사람이고. 언니 마음속에 엄마를 키워봐. 언니 스스로 못나 보일 때마다 마음속 엄마를 꺼내서 ‘그래도 엄마는 승민이 사랑해. 네가 못나도, 어디가 아프고 병이 들어도, 아무 것도 못해도 엄마는 승민이 사랑해.’ 하고 생각해봐. 엄마는 정말 그렇잖아. 쉽게 말하면 언니 혼자서 1인 2역을 하라는 거지. 아……. 갑자기 울면 어떡해? 나도 눈물 나잖아. 아, 씨….”

 

토요일의 자정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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