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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감각하게

“행복할 수 있지?”

“그럴 수도, 저럴 수도 있어. 그러니까 행복할 수도 있겠지?”

흰 담벼락에 기대어 하늘을 보았다. 때가 검게 탔어도 흰 벽이라고 부르는 담벼락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를 쏟아도, 천둥 번개가 내리쳐도 하늘은 하늘이라고 부르네. 마찬가지로 울든 웃든 나를 부르는 이름은 하나뿐이지. 빈 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한 번에 밟아 찌그러뜨렸다.

“꽁초 집어넣으려고 했는데.”

“주머니에 쑤셔 넣든 알아서 하세요.”

“못됐다.”

“나 차버린 건 너야.”

이유를 다 알아도 미운 건 미운 거였다. 속 좁다고 욕한다 한들 어찌할 수 있을까? 붙잡지 않는 것만으로도 할 일은 다 했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하고 싶은 말을 못 뱉는 미화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리기 좋은 선이었는데, 아깝다.

“우리 이제 그만 보는 거지?”

“왜?”

“아니, 그냥.”

그냥은 무슨. 우습게도, 미화의 모습을 그리고 싶을 때가 가까운 시일 내에 찾아오면 딱 한 번만 더 볼 수는 없는지 궁금했다. 언제든 내 마음껏 그리게 해주었으니까 그까짓 거 가벼운 일 같았다. 눈치는 다 말아먹었다는 소리를 안 들었으면 또 헛소리를 하고 말았겠다. 어쩌면 미화는 허락해줄 수도 있다. 미화는 그런 애니까. 하지만, 낮게 나는 비행기의 소음이 우리를 납작하게 깔아뭉개는 동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미화의 모습이 간단하게 내다보였다. 당연히 다시 만날 시간이 없겠지. 게다가 누구 좋은 짓이라고.

미화는 꽁초를 담벼락 틈에 쑤셔 넣었다. 이미 담벼락에는 담배꽁초 천지였다. 멀리서 담벼락 전체를 보면 틈에 끼운 담배꽁초들이 무슨 형태를 그린 것처럼 보였다. 별자리를 선으로 이으면 전갈이 되기도 하고 저울이 되기도 하듯이.

아무 영양가 없는 대화가 뭐가 좋은지 미화는 담배 한 개비를 또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기분이 들어서 삐딱하게 벽에 기대있기만 했다. 작업실에 들어가 봤자 마음이 산란해서 손에 칼 한 자루도 잡기 싫을 게 뻔하다. 여기 서서 미화의 담배 연기 냄새나 흠뻑 마시며 수명을 줄이는 게 낫겠다. 재미없는 인생을 더 살아서 뭐 하니? 미화도 나와의 연애놀음이 별 재미가 없으니까 떠나려는 거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 이름 모를 동네에서 재미난 인생을 사는 잘생긴 남자들을 찾으려고. 대단한 동기도 없으면서 갖은 명분을 다 끌어와 갖은 폼은 다 재는 이 여자를 누구든 구제해주길! 특별히 할 얘기도 없으면서 떠날 타이밍을 잴 줄 몰라 담배나 낭비하는 이 여자를 누구든 예뻐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미화가 바라는 전부였다. 내가 미화를 사랑했어도 미화가 바라는 모양의 사랑이 아니었으니 나를 떠날 명분은 꽉 채워졌다. 그래도 본인이 원하는 모양새가 있을 테니 마지막 모양은 미화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가만히 두었다. 맥이 빠지는 대화도 더 주워 담을 게 안 남았고, 담배꽁초를 끼울 담벼락 틈도 찾기가 어려워졌으니 슬슬 가려고 하겠지.

때가 시커멓게 탄 벽에다 저무는 마음을 쑤셔 박고 각자의 길로 발길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본 미화의 옆얼굴을 단단히 기억해두고 스케치북에 실루엣을 그렸다. 예쁘게 그려지지 않는 이유는 줄줄이 피워대던 담배 때문인지, 내가 속 좁은 인간이라서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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