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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과부하

이런 망상도 상상력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물론 우주나 심해, 초능력,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 시간과 공간으로 그리는 공상도 한다. 그런데 보통은 '거창한' 상상의 세계보다 '소박한' 망상을 훨씬 자주 한다. 좋아하는 연예인과의 은밀한 밀애는 말할 것도 없고, 부자가 된다면, 유명인이 된다면…. 가만 보니 이쪽도 '거창한' 상상의 세계에 속하네.

이보다 훨씬 소박한 잡생각은 이렇다.

'고속도로 중앙을 분리하고 있는 방음벽 아랫단 유리는 차들의 매연으로 뿌옇게 되어 있다. 혀로 핥으면 어떨까?  그라목손 한 방울만큼의 위력일까? 아니면 그냥 쓴맛이 날까? 다들 나를 미쳤다고 할까? 하지만 혀로 핥아보는 실험을 해보고는 싶다.'

'교습소에서 수업을 받는 학생들이 한창 조용히 문제를 푸는 와중에 내가 엄청 큰소리로 방구를 뀌면 어떻게 될까? 심지어 냄새가 무진장 지독하다면? 폭소를 터뜨릴까? 안타까워서 감히 웃지도 못할까? 혐오스러워 할까? 학교 친구들에게 웃긴 일화가 있다며 온통 소문을 내겠지? 어떻게 생긴 인간인지 궁금해서 교습소 학생이 좀 늘어날까? 그러면 노이즈 마케팅의 특별 사례로 써먹을 수도 있겠네.'

'문 열어둔 교습소로 무작정 남자가 쳐들어온다. 나는 잡상인인 줄 알고 살살 달래서 돌려보낼 생각을 하고 현관께로 나갔더니만 잡상인이 맞기는 맞았다. 그런데 낯이 익다. 자세히 보니까 중학교 동창이다. 못 알아본 척을 해서 돌려보내야 할까? 알아는 봤어도 친분이 없다는 핑계로 역시 돌려보내야 할까? 아니면 뭐라도 사줘야 할까? 아직 그 정도의 재정 상황이 안 된다면? 서로 어려운 처지 이야기를 하며 입맛 씁쓸한 소리만 하다 또 역시나 돌려보내야 할까?' - 이건 있을 법한 상황이다. 보통 나이가 들면 중학교, 고등학교 나온 본고장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터를 잡는데 나는 지금껏 살던, 심지어 모교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다. 고교 후배들을(까마득하기까지는 아니지만 가물가물한 정도의) 학생으로 받아서 옛 선생님들 소식도 전해 듣는다.

'바퀴벌레나 개미가 우리 교습소를 점령 중인데 우리만 그런 줄 모르면 어떡하지? 입구 벽 모서리를 평지 다니듯 오르내리는 개미들을 우습게 생각해선 안 된다. 가끔 남자 어른 엄지손톱 만한 바퀴벌레의 출현도,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취급해선 안 된다.'

예외도 있지만 주로 더럽고 혐오스러운, 그래서 일상적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을 상상한다. 상상하면서 동시에 역겨워한다. 개수대에 모인 음식물쓰레기를 안 쓰는 그릇에 모아놨는데 모르고 먹어버린다면? 이 일은 실제로 가까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남동생이 부주의하기도 하고, 엄마가 가끔은 이해 못할 정도로 위생에 신경을 안 쓰기 때문도 있다.

나도 만만찮게 더럽고 혐오스러운 일을 직·간접적으로 겪었다. 배변활동이 매우 활달하던 청소년시절 교복에 응아를 해버린 적도 있고, 우리집에 놀러온 친구와 눈물이 줄줄 나오도록 웃긴 농담을 주고받다가 친구가 쉬를 해버린 적도 있고, 뭐 개똥 밟는 일이야 싱거울 지경이다. 같은 반 남자애와 장난을 치다가 녀석의 손이 내 입에 들어와서 침 묻은 손가락을 내 옷에 슥슥 닦아냈던 일도 있다. 멜빵바지를 입고 소변 누는 법을 몰라서 끈을 전부 풀어놓고 싸다가 끈을 변기물에 통째로 빠트리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들, 불가항력적인 일들이 아닌가? 사람은 똥을 누니까, 방구를 뀌고, 오줌을 싸고, 토를 하고, 귀에는 귀지가 있고 코에는 콧물이랑 코딱지가 있고, 입에는 침도 있고 가래도 끓고, 몸에는 때가 나오고, 피지도 있고, 기름도 나오고, 사람 자체가 오염물 제조업자니까 더러운 일들은 우리 몸에 붙어서 따라오잖아.

사람의 자연스런 생리현상들이 대부분 다 더러운 취급을 당하니 새삼 거추장스럽다. 더럽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는 모양이다. 예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일단 각종 생리현상을 잘 조절하고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건 기본 예의에 어긋난다. 그런 이유에서 나의 소소하고 소박한 상상은 나름 재미가 있다. 실제로 있을 수 없는 일을 벌여놓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초능력이나 타임머신 같은 공상과학이 오히려 따분하게 들린다.

있을 법하지만 웬만해선 잘 생기지 않는 일들을 상상한다. 사람들의 경악하는 얼굴을 떠올려 봐라. 너무나 웃기다. 웃다가 방구가 북 새어나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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