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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수 없는 사랑

꿈 그리고 여행

실은 옷 단추를 잠그다가 공허하게 떠나온 길이었다. 단조로운 일상을 피해, 새로운 삶과 애틋했던 과거를 꿈꾸며 목적지 없는 여행길에 올랐다.

 

무작정 타고 온 버스는 중간에 소도시를 머물다 갔다. 기다림이 싫어 경유지에서 훌쩍 내려버리고는 시내를 돌던 버스를 다시 잡아탔다. 버스는 짧은 시내를 돌다가 번화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번화가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상가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시내 종점쯤에서 내린 빨간 넥타이의 남학생이 힐끔 눈을 마주쳤다. 흐린 날씨에 하얀 와이셔츠가 환하게 돋보였다. 차창을 사이에 두고 소년의 눈빛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흔히 지나치는 시선이 아니었다.

시내를 벗어난 버스가 속력을 냈다. 얼마 안 가 도로변에 풀이 보였고 싱겁던 마음은 흐트러진 풍경에 갑갑하게 뭉쳐졌다. 창밖에는 점차로 차도 줄고 사람도 줄고 세워진 건물도 안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벨을 꾹 눌렀다.

공장단지 앞에서 버스가 정차했다.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땅에 발을 내디뎠다. 해진 작업복 차림의 남자들이 지나다니며 낯선 여자를 맘 놓고 훑어보았다. 공장단지 안쪽 넓은 공터에는 대형 화물차와 운전사들, 쌓아놓은 팔레트, 그 위에 올라앉아서 휴대폰 음악을 크게 틀고 어깨를 흔드는 남자들이 있었다. 곧 작업복을 위아래 세트로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나와서 상스러운 욕설을 날렸다. 일상인 듯 천연덕스럽게 젊은 남자들은 시시덕거리며 건들건들 화물차 뒤로 사라졌다.

 

낯선 여자는 늘어선 화물차를 보며 항구에 정박한 배들을 떠올렸다. 넘실대는 파도 대신 이곳에는 뿌연 먼지가 풀풀 날아다녔다. 이 이상 더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명도 처음 들어보았고 뭐를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시간만 뒤죽박죽 흘러가 이미 늦은 오후에 걸쳐졌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위치를 설명하느라 애먹었다. 당장은 차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얼마든지 기다릴 참이었다. 느지막한 햇살은 마주 보이는 산에 울타리를 둘렀다. 한가로웠다. 도로의 노란 실선 위를 지나는 검은 개미가 눈에 띄었다.

환절기용 검은 외투를 바짝 여몄다. 괜한 궁금증에 버스정거장 뒤로 돌아 인가가 드문 동네를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에 이끌려 공장 뒤편으로 가자 가을풀이 높게 자란 예배당 안에서 합창 연습을 하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길에 서서 노래를 듣다가 자동차 경적이 들려 근처 버스정거장으로 돌아왔다. 은색 택시 한 대가 정거장 앞에 세워져 있고 운전석 문에 기대서서 콧날이 오뚝한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중이었다. 남자의 눈길이 회오리처럼 빠르게 회전해 그대로 여자의 눈에 꽂혔다. 멍하니 뒷좌석에 올라타 기사가 담배를 다 피우길 기다렸다. 기사는 꽁초를 튕겨 길바닥에 버리고 훌쩍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

백미러로 흘끔 쳐다보며 기사가 물었다. 여자는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갈 만한 데… 아세요?”

짧게 기른 콧수염은 다문 입 위에서 요지부동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눈길은 여전히 엉겨 붙어있었지만 남자는 지금 머릿속을 터벅터벅 걷는 중이었다.

“저 여기 처음이거든요.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지…. 무작정 나오긴 나왔는데… 이대로 돌아가긴 싫은데….”

여자는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었고, 그렇지만 날이 새기 전에 어딘가 좋은 데를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어디 아는 데 없으세요?”

대꾸도 없이 남자는 거칠게 기어를 바꾸며 운전대를 끝까지 돌려 반대편 차선으로 급히 유턴했다. 반대편 차선에 정차한 채로 뒤돌아보며 남자는 물었다.

“그 전에 다녀올 데가 있는데, 괜찮소?”

여자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듣곤 남자는 액셀을 세게 밟았다. 파도에 쓸려 떠밀려가는 뗏목같이 빠르고 위태로웠다.

 

택시는 도로변에 있는 어느 낡고 휑한 주유소로 들어갔다. 가격표도 붙어있지 않고 사람도 없어서 운영하는 곳은 아닌 것 같았다. 기사가 잠시 기다리라는 듯 눈짓만 하고 밖으로 나섰다. 여자는 지켜보다가 그를 따라갔다. 남자는 자기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여자를 보고 피식 웃었다. 주유소 구석에는 흰 벽에 금이 가 있고 까만 곰팡이가 군데군데 핀 건물이 한 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천장이 머리에 닿을 만큼 낮고 복도는 좁았다. 남자는 앞서서 주황색 불이 은은한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며 누군가에게 인사했다. 방안에는 1인용 가죽 소파와 삐거덕 소리를 내는 안락의자에 두 남자가 마주 앉아서 택시기사를 맞이했다. 두 남자는 뒤따라온 여자를 보고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변에 갈 거야. 같이 가보지그래?”

택시기사가 소파에 앉아있는 말총머리 남자 옆에 놓인 스툴에 앉으며 말했다. 낯선 여자는 거리낌 없이 남자들을 가로질러가 지푸라기 색 트윈소파에 두 다리를 올려 기대앉았다. 남자들은 여자를 끔뻑거리며 쳐다보았다.

“날도 흐리고 그다지 가고 싶지 않은데….”

“강변에 안 가보시겠소?”

남자들이 따분하게 대답하자 기사는 여자에게 물었다.

“저는 가볼래요.”

나른하게 미소를 지으며 여자가 대답했다. 맞은편 남자가 눈을 내리깔며 “그럼 나도….”라고 함께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여자는 이제야 조금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 같아 긴장이 풀렸다. 잠이 오는지 길게 하품을 했다. 잠깐 쉬었다가 가도 좋을 것 같았다. 껌벅껌벅 졸음에 겨워하는 여자를 보곤 두 남자는 자리를 피했다. 어두운 주황빛 조명이 따사롭게 태양이 지듯 여자의 콧등을 비췄다. 택시기사는 헝겊으로 된 담요를 꺼내와 잠든 여자에게 덮어주며 가지런한 속눈썹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숨결이 오갈 때마다 흘러내린 긴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

 

여자와 남자는 갑판에 놓인 의자에 앉아 날카로운 바람을 정면으로 맞았다. 여전히 잠이 덜 깬 듯 여자는 몽롱하게 하얀 물보라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간은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말로 보면 찰나에 가까웠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어땠을까? 그건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래 기억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여자는 잠에 깨어났을 때도 그 순간을 기억해냈다. 볼을 감싸던 남자의 따뜻한 손, 솜털을 간질이며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겨주던 손끝은 영원히 각인되었다. 남자의 하얀 이는 꼭 맞게 박힌 자갈처럼 고르고 가지런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검은 눈썹과 검은 콧수염은 여자의 흰 손을 더 희어 보이게 했다.

 

남자의 친구들, 말총머리 남자와 둥글둥글한 감자를 닮은 남자는 껌을 나눠 씹으며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둘을 건너다보았다.

“좋아 보이네.”

말총머리는 말없이 친구의 말을 받았다. 꽁지머리가 바람에 날려 파닥거렸다. 자기 모습을 어떤 매력적인 여자가 봐주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만 되면 그 여자의 시선도 즐길 수 있고 머리를 기른 남자만의 남자다움을 뽐내면서 매력적인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려고 기른 머리였는데 이런 날 작은 유람선에 젊고 매력적이면서 혼자 온 여자를 찾기란 힘든 일이었다. 머리털이 끝내주게 멋진 모양으로 휘날리고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에 답답해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자도 비슷한 마음으로 일어나 서로 다른 장소를 찾아갔다. 감자는 뱃속 물통을 비우러 화장실로 떠났고 말총머리는 주변을 맴돌다가 반대편 갑판으로 가 난간에 팔을 올려 몸을 기댔다.

 

남자는 여자를 어루만지듯 한참을 뜯어보았다. 얼굴의 모든 군데를 다 살펴보고 다시 반복하며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자의 빼어난 미모 때문도 아니었고 여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사랑스러움 때문도 아니었다. 여자는 눈을 흐리멍덩히 뜬 채로 유람선의 분위기를 즐겼다. 자신의 모든 부위를 쪼개듯 바라보는 남자와 함께여서 바람이 부는 드넓은 강은 포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 세계가 지금의 모습 그대로 영원할 것이기에 그만큼 위태로웠다. 바람은 오로지 그녀가 맞는 곳에서 불어왔고 해는 잠들기 전부터 그 자리 그대로였다.

눈을 뜨자마자 여자는 이미 모든 것을 잃은 후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눈을 감았을 때와 거의 같았다. 지금에 와서야 여자는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무언갈 잃게 되는 건 그녀가 아니라 남자였다. 남자의 행동거지가 수상했다.

“날 잊을 거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버릴 거고?”

상심에 절은 말투로 여자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남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안 돼. 날 봐.”

벌써 남자의 얼굴이 흐릿한 상으로 보였다. 그가 언제부터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 이제는 그의 눈빛이 기억나지 않았다. 선글라스에 가려졌어도 그녀를 보는 눈길은 까다롭고 신중했다. 요목조목 빼놓는 구석 없이, 약간 세모진 귀 끝까지 손으로 만져보며 감각을 총동원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여자의 한쪽 눈에 맺혀있던 눈물은 볼을 타고 주룩 흘러내렸고, 이렇게 될 줄 알지 못했던 것도 같고, 다 알았던 것도 같았다. 눈을 꾹 감고 흐려지는 남자의 시선을,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지도록 품고 간직했다.

 

여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빈껍데기 같은 집안은 허전했고 찬 공기가 벽지까지 스며들어있었다. 차고도 허망했다. 깎아낸 손톱처럼, 뜯어낸 입술 부스러기처럼 쓸모없는 바스락거림만 여자에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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