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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나는 어딘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당신에게 끌리고 있습니다.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뼛속까지도 외로운 그대, 초점 없는 눈으로 상념에 빠져있네요. 당신의 긴 다리와 목덜미, 구부리고 있어도 각진 어깨선을 보며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일까? 당신은 누구일까? 아무도 내 궁금증을 풀어줄 수 없는 것을 알아 나는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그대에게 다가갔습니다. 당신은 나의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파묻은 고개를 드는 시늉도 않더군요. 나는 조금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위축되기도 했습니다. 나는 바텐더에게 위스키를 한 잔 주문하고 다리를 꼬았습니다. 당신이 앉은 방향으로 말이죠. 일부러 당신의 다리를 살짝 스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실수였던 것처럼 당황하며 사과의 말을 건넸죠. 말문을 트기 위해서였다는 걸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죠? 당신은 비스듬히 고개를 들고 괜찮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듣기에는 거의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당신은 아까보다도 더 깊이 자기 세계로 파고들어갔습니다. 나는 위스키를 홀짝이며 더 말을 걸지 말지 망설였고요. 하지만 당신은 나와 술래잡기라도 하자는 것처럼 내가 주문한 음료를 다 마시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나는 아까와 달리 정말 당황스러워 재빨리 계산을 마치고 당신의 뒤를 쫓았습니다. 가게 밖으로 빠져나간 당신은 얼마나 바람보다 빠르던지 하마터면 완전히 놓칠 뻔했습니다. 나는 멀리서 당신이 택시도 잡지 않고 코트의 깃을 세우고 어두운 길로 나서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은 그다지 차지도 않은 밤바람에도 주머니 속 깊이 손을 찔러 넣고 천천히 흔들흔들 걸어갔습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너무 무방비하고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나는 다시 호기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당신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리고 당신은 정말 누구일까? 당신의 검은 고수머리가 바람 따라 헝클어지는 것을 보며 마치 깊은 물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게 된 것으로 내 눈엔 보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가는 방향으로, 꺾는 방향으로 미친 사람처럼 뒤쫓아 갔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뚝 길가에서 멈추었을 때 나도 따라 멈췄습니다.

“왜 쫓아옵니까?”

당신의 성대를 거쳐 나온 소리의 울림이 너무나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 했습니다.

“언제까지 쫓아올 겁니까?”

당신이 두 마디를 뱉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정신을 차린 것은 당신의 아파트 침대 위에서 눈을 뜬 후였습니다. 당신과 나의 눈이 강렬하게 마주쳤을 때 우리를 막아서는 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내가 한 걸음 더 다가서자 기다렸단 듯이 당신이 내 앞으로 달려와 얼굴을 부여잡고 격정적인 키스를 쏟아 부었죠. 나는 황홀해서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은 바보처럼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당신은 알 수도 없었을 나의 눈물을 두 손으로 닦아내주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손에 이끌리어 우리가 멈춰 선 곳 바로 앞에 있던 낡은 건물로 들어갔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곳을 계단을 뛰어올라가 차오른 숨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나의 호흡과 당신의 호흡은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벗어놓은 셔츠를 걸쳐 입고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자고 있는 당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날은 이미 밝아져 왔는데도 당신의 눈은 어젯밤과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의 찌푸린 눈에 담긴 깊은 어두움이 나의 가슴을 찌르고 들어왔습니다. 당신을 내버려둘 수가 없다고 나는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살짝 당신의 어깨에 기대듯 엎드렸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당신의 몸은 단단하고 따뜻했습니다. 당신이 잠에서 깨었는지 한 팔을 들어 내 몸을 감쌌습니다. 당신의 입이 살짝 열리며 하얀 이가 조금 드러나 보였습니다. 따뜻하지만 슬퍼 보이는 미소였습니다. 나는 당신 턱에 조금 자란 까칠한 수염을 손가락으로 매만졌습니다. 당신은 기분 좋게 눈을 뜨며 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묻고 싶던 것을 당신이 먼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지? 어떤 사람이야?”

나는 대답 없이 그저 웃음소리를 흘렸습니다.

“왜 날 쫓아올 생각을 한 거야?”

이번에도 나는 대답할 생각이 없어 가만히 그의 몸에 기댄 채로 있었습니다.

“아무렴 어때. 상관없어. 난 당신이 맘에 들어.”

나는 동감의 뜻으로 당신에게 입 맞췄습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고 나는 온 세상을 다 가져도 이보다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이런 행복이 단 오늘로 끝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아무렴 어때.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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