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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지 아저씨

  그의 나이, 당시 30세 정도로 추정. 어쩌면 40대일지도. 그의 거주지, 미확인. 그의 직업, 백수건달. 그의 하루 수입, 하루 삼, 사천 원. 많으면 만원. 그의 아지트, 놀이터. 그의 이름, 박 아무개. 그리하여 그를 칭하는 우리들의 은어, 바가지 아저씨.

  서울에서도 도시화가 덜 되어 서울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민망하고, 촌이라고 하기에는 미안한 낡은 동네가 더러 있다. 대개 그런 동네들은 ‘재개발’이라는 반강제적 국가 미용실에 의해 싹둑싹둑 잘리고 깎여서 깨끗하고 깔끔한 현대식 동네로 개조되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10년 만에 찾아간 나의 본향 ‘황학동’ 역시 그런 운명을 맞기는 했지만, 나의 고집만큼이나 끈질기다, 이 동네는. 여전히 서울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민망하고, 촌이라고 하기에는 새로 지은 고층 롯데 아파트가 불쌍하다. 그 앞에 고가도로를 싹 밀고 파내어 만든 청계천은 또 어떻고. 한창 또랑또랑했던 시절을 다 보낸 이곳의 변화는 나에겐 이질적이기만 하다. 이곳을 변화시키기란 보통 내기로는 어려울 게 분명하다. 고물 냄새가 짙게 나는 이 동네에는 구석구석 숨겨져 있는 비밀 골목길과 비린내 진동하는 시장 바닥에 변하지 않는 흐릿한 얼굴들, 여전히 찾아가면 우리 식구를 알아보는 낡은 이웃들이 역사 속에, 내 기억 속에 정지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곳을 떠난 때는 워낙 어리고 머리가 맑을 적이라 눈을 감으면 여전히 동네를 훤히 꿸 수 있다. 그때는 발품을 팔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노상 노는 게 일이었던 덕분에 하루 종일 숭인동, 신당동, 왕십리를 헤매거나 야시장, 벼룩시장, 도깨비시장에 신기한 볼거리며 눈부신 불빛 밑에서 사람들을 헤집고 다니느라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재미있는, 남아서 썩어나는 시간을 보낼 놀이터가 지천이었다. 놀다가 땀이 나면 바로 옆에 고가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불어다주는 쾌쾌한 바람을 맞으며 동네 애들과 소란스럽게 소리를 질러대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학교가 끝나고 노는 시간도 진국이었지만 학교 가는 길마저도 지금 회색에 거의 가까운 내게는 맛깔스러운 것이었다. 늘 가던 길로만 가는 것은 재미가 없기 때문에 나는 별별 길로 한 번씩은 다 다녀보았다. 주방기구들만 모아다 파는 가게가 죽 늘어선 골목이나 평화시장까지는 곧장 갔다가 그 앞에서 코너를 돌아 다시 직진을 하기도 하는데, 제일 많이 다니던 길은 역시 가장 단거리였던 영미시장을 거쳐 지하상가를 통해 놀이터를 지나 88빌딩 앞에서 건널목을 건너는 쪽이다.

  가장 단거리였기 때문에 자주 다녀야 했던 그 길목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바가지 아저씨라는 존재로 인해서 어둡고 삭막하고 음침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놀이터의 입구가 보일 무렵이면 나는 두리번두리번 눈치를 보며 잔뜩 쫄아서 조심히 지나가곤 했다. 놀이터만 지나면 해방이었다. 다시 신나게 뛰어다니며 등굣길에 만나는 아는 친구들과 장난을 치면서 무사히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가까워 오고, 그보다도 하루 종일 학교에서 지내느라 잊고 있던 바가지 아저씨가 하교를 하며 놀이터를 지나쳐야 할 때에서 생각이 나면 또 잔뜩 쫄아 그의 사방 3, 4미터는 떨어져 죽 돌아서 놀이터를 빠져나가야 했다.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다시 천방지축 날뛰며 시장을 쏘다니고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나서 역시나 바가지 아저씨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몇 날 며칠을 보내고 나서야 학교를 가고 오고 할 때마다 놀이터를 지나야 하는 것이 내게는 고역임을 깨닫고 다른 수를 찾기 시작했다. 언니나 친구들이 함께일 때에만 놀이터를 지나는 지름길을 이용하고 혼자일 때에는 정신 바짝 차려서 다른 길을 개척해 다녀야겠다는 게 8살짜리 머리로 낸 최선의 대책이었다. 그렇게 해서 몇 번인가는 평화시장 쪽으로 크게 한 번 코너를 도는 길을 택하여 다녔는데, 놀러 다닐 때는 멀게 느껴지지 않던 이쪽 길이 혼자서 외롭게 하교의 사명을 다하자니 여간 심심하고 지루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짧게 가는 길을 찾기 위해 그 때부터는 놀이터를 거치지 않고 갈 만한 길을 찾아 건물 사이사이를 다니며 샛길을 찾아보았다. 그런 모험은 또 다른 시련을 낳았다. 건물의 낮은 벽을 넘다가 경비 아저씨께 걸려서 된통 혼이 나고, 개척하려고 한참 들어간 길이 막다른 길이고, 막상 샛길로 나와 보니 여전히 놀이터를 지나기 전이라 놀이터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냥 바가지 아저씨 눈치를 보며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만큼 조심히 놀이터를 지나기로 했다.

  나는 약간 모자란 행동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이 길을 지나는 아이들은 나를 포함해 수백 명은 될 것이다. 학교를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에 놀이터 길을 애용하는 학생들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언니만 해도 그 아저씨를 나처럼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무섭고 기분 나쁘긴 하지만 바가지 아저씨가 아무나 건드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허나 바가지 아저씨가 우리들 같은 초등학생들을 건드리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지나는 아이들을 불러서 돈을 뺏기도 했다. 일도 전혀 하지 않는 그는 놀이터를 배회하며 쉬고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가서 손을 벌려 뭐라 뭐라 말하면서 주머니에 든 꼬깃꼬깃한 몇 천원을 받아냈다. 그때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대꾸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돈을 내주고는 언짢고 노엽게 혀를 차는 것으로 상한 기분을 드러냈다. 놀이터는 바가지 아저씨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놀이터에서 마음 놓고 놀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친구랑 놀이터에 갔다가도 바가지 아저씨가 있는지 먼저 살펴본 다음 그가 없으면 눈치를 보며 놀다가 어디선가 나타나면 얼른 숨어서 다른 곳으로 달아나곤 했다. 언젠가는 친구와 그네를 타고 싶어서 놀이터에 간 적이 있다. 그날은 바가지 아저씨가 그의 보좌나 다름없는 넓은 평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만 그네가 정말 타고 싶고 오늘만큼은 놀이터에서 놀고 싶다는 집념 때문에 눈치를 계속 보면서도 친구와 도망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그네를 탔다. 그러다가 친구가 그네를 탈 차례에 잠시 울타리에 올라가 앉아 있었는데 그의 거동이 어디로 움직일까 궁금해서 자꾸 그를 흘깃거리며 보았다. 바가지 아저씨 주변에는 같은 반 남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는 아저씨와 친한 것 같았다. 아저씨와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은 대부분 험상궂고 또래 임에도 무서워 보이는 힘이 있었다. 그를 위해 담배 심부름 같은 것을 해주며 간식도 얻어먹고 그의 명령에 따라 아저씨의 말에 복종하지 않은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고 괴롭히기도 했다. 아무튼 바가지 아저씨와 졸개들인 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습은 너무나 비상식적인 조합이었다. 30대 백수 아저씨와 초등학생들의 불량 모임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된다. 그때는 내가 겨우 8살이었고, 8살의 눈에서는 크게 안 될 말도 아니었다. 아저씨가 시키는 시답잖은 일을 아이들이 대신 해주면 보수로 100원, 200원 많게는 500원이 그 손에 떨어진다. 참 대단히 위험하고 무서운 세계였다. 그러니 그때 바가지 아저씨가 자기를 연신 흘깃거리는 나를 향해 손을 올려 까딱까딱하면서 이리 오라는 제스처를 취했을 때 내 두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며 하마터면 울타리에서 떨어질 뻔 한 것도 당연하다. 나는 그를 못 본 척 했다. 고개를 미세하게 움직이며 그가 아니라 그 뒤에 건물을 보는 척 했다. 그러면서 머리로는 얼른 변명거리를 준비했다. 아저씨가 다가와서 “너 왜 부르는데 안 와?” 하면서 때리려고 하면 “아저씨 못 봤는데요.” 하는 어설픈 작전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친히 직접 내 앞으로 오시지는 않았다. 바가지 아저씨 때문에 그네 타기를 포기한 친구가 놀이기구 계단 밑에 작은 공간에서 흙을 파며 놀다가 내게 이리 들어오라고 작게 속삭였다. 나는 재빨리 그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 계단 사이 틈으로 바가지 아저씨를 보니까 같은 반 남자애에게 뭐라고 또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해맑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우리는 완전히 겁에 질려서 “이제 우리 죽었다. 어떡해?”하며 입으로 말하면서 흙 파는 놀이를 하는 척 했다. 남자애는 다가와서 우리에게 까불지 말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흙 파는 놀이가 유치하대나? 그러더니 내 친구를 한 대 때려주었다. 그게 끝이었다. 우리는 1분 정도 지체하고 쏜살같이 달아나 놀이터를 빠져 나왔고 다 나와서 시장 통에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적응하고서야 아까 있었던 웃긴 상황에 대해 말 안 하고도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친구는 자기만 한 대 맞은 것이 분하고 또 왜 맞아야 했는가를 생각하더니 더 분해했다. 선생님들도 바가지 아저씨를 알고 있었고 아이들에게 그와 어울리지 말라고 몇 번 당부했었다. 그래서 친구는 자기를 때린 남자애를 선생님께 고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남자애가 잘생기고 활발해서 인기가 많았는데 내가 알기로는 친구도 걔를 좋아했던 것 같다. 사실 바가지 아저씨는 귀엽고 잘생긴 아이들만 골라서 건드린다는 소문이 있었고 같은 반 남자애가 그 증거였다. 나는 그 소문을 알고 있는 언니와 친구들 몇 명에게 바가지 아저씨가 날 불렀노라고 말했지만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말았다. 바가지 아저씨가 부른 건 네가 예뻐서가 아니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기까지 해서 나는 공주병 세계의 입구까지 갔다가 쓸쓸히 되돌아와야 했다.

  나는 한동안 개그맨 최양락 씨를 굉장히 싫어했다. 덕분에 최양락 씨를 닮았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싫어졌다. 왜 그렇게 최양락 씨가 싫은지 누군가 물어봐서 “그냥 난 그런 스타일 싫더라. 맘에 안 들어서.”라고 했고 스스로도 그게 다인 줄 알았다. 나중에서야 생각해보니까 그 바가지 아저씨가 개그맨 최양락 씨와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특유의 찌그러진 눈이나 이목구비가 언뜻 보면 비슷한 얼굴이었다. 바가지 아저씨의 평소 품행이 개그맨 최양락 씨에게 덮어씌워져 싫어진 것이다. 그걸 알고 나니까 자연스레 최양락 씨가 별로 싫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다가 바가지 아저씨에 대한 어릴 적 악몽 같은 기억들도 기억은 남아 있지만 감정은 흐릿해져버렸다.

  다행히 이천으로 이사를 가기 전에 바가지 아저씨의 결국을 들어 알 수 있었다. 주민 신고로 경찰서에 연행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초등학생들이 놀이터를 지날 때는 환한 대낮이다. 바가지 아저씨는 그 시간에는 그만큼 순하게 지냈었나보다. 그가 주로 횡포를 부리며 강도질을 일삼을 때는 날이 저물어 어두워진 때였다. 그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때리기도 했고 돈이나 지갑을 통째로 빼앗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본 그의 모습은 빙산의 일각이고, 아주 깨끗하고 정화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저 놀이터를 배회하며 몇 천원을 빼앗거나 건들거리며 초등학생들에게 괜한 장난을 건 게 전부였던 것이다. 그렇게 경찰서에 연행되어 철창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지만 그 정도면 놀이터에서 꽤나 해먹고 갔다. 그가 놀이터에 자리를 튼 건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였고 체포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3학년이 된 때였으니 몇 년이나 놀이터에서 군림하며 폭정을 휘두른 것이다. 절대군주를 잃은 놀이터는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놀이터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곳은 아이들의 만남의 광장이 되었고 썩어나는 시간을 죽일 다채로운 놀이 공간 중에 하나가 된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주머니가 비는 날이 줄어들었다. 할아버지들은 담배를 피우셨고 할머니들은 넓은 평상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바가지 아저씨가 그간에 저질렀던 비윤리적인 행태에 대해 저마다 한 마디씩 하셨다. 할머니들의 입이 전한 무지막지한 바가지 아저씨의 전적은 또다시 우리들 귀에 들어갔고 소문은 돌고 돌아서 부풀려지고 과장도 되었다. 너무 심하게 부풀려져서 바가지 아저씨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억지 루머도 떠돌았다. 아저씨가 떠나고 얼마 뒤, 나도 그곳을 떠났다. 어쩌다 가끔씩 서울에 갈 때마다 그곳은 많이 변해 있었고 갈수록 낯선 풍경들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지리도 많이 까먹고 돌아다니다가 길을 헤매기도 했다.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족처럼 다른 곳으로 떠났고 그만큼 과거는 조각이 나고 구멍이 났다. 그러니 겨우 한 자리 수에 불과했던 어린 나이에 내가 겪은 짜릿하고 스릴 있던 놀이터 통과하기는 이미 퇴색되어 떠올려 봐도 그저 옛날 일일 뿐이다. 아마 지금쯤은 그 놀이터도 없어졌을 것이다.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가 전해주기로는 그쪽은 다 허물고 높은 건물이 진을 치고 있다 했으니 말이다. 결국 다 옛날 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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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내 혀를 깨무는 짓이야
#17
변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