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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

교습소를 차리게 된 계기

  전공을 살리는 일을 찾겠다, 글을 쓰겠다, 이 두 가지 핑계로 10개월 동안 일하던 작은 화장품 사무실을 뛰쳐나온 게 3년 전이다. 마지막 남은 학자금 대출을 갚으려고 아무 직장이나 들어가서 다달이 대출 원리금을 상환하다가 상환이 모두 끝나자마자 일을 그만두었다. 여기까지는 나름대로 계획하던 대로였다. 대학에 가서는 창작을 전공하기로 했는데 미묘하게 노선을 변경해서 국문과에 들어갔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단추를 잘못 꿴 것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학자금 대출을 최대한 빨리 갚기로 했다. 무슨 일이든 적당히 몸 굴리는 일 잡아서. 사무직이 아무래도 무난하다 싶어서 쉬워보이는 일자리를 찾다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기도 했었다. 화학 전공자들이나 들어갈 법한 연구실에서 흰 가운을 입고 실험하고 데이터를 정리해서 공장에 보내주는 일이었다. 단기간만 하는 일이어서 그런 대로 참고 할 만했다. 의외로 적성에 맞아서 진로를 바꿔보라는 추천도 받았었다. 그렇지만 계획하던 일이 있어서 뜬구름 같은 소리로 듣고 넘겼다. '나는 글을 쓸 사람인데?' 재미있는 경험이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 후에 당분간 백수생활을 했다. 엄마가 내 영혼을 시커멓게 태우는 잔소리로 매일매일 가슴에 불을 질렀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 뒤를 바투 잡고 쫓아오는 대출금 상환 날짜가 집에서 조용히 글을 쓰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직업 소개 사이트에 들어가서 한량이 할 수 있는 최적의 일자리를 찾아보았다. 다행인지 적어도 머리가 돌대가리만 아니면 누가 해도 했다는 티 안 나는 일이 있어서 곧장 면접을 보고 일을 구했다. 10개월이 마치 10년인 듯 더디 가는 따분한 일거리로 젊은 시간을 또 축내었다. 아무것도 배울 게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태만병이 또 도져서 그저 시간을 허비하기만 했다. 게다가 월급을 주는 상사 옆에서 자기계발을 위한 공부를 펼쳐놓고 하자니 보통 눈치를 주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방판에 대해 관심이 생겨서 이쪽 일을 배우고 싶은 마음도 안 드는데 얼른 돈 갚고 사무실을 나와주는 게 상부상조인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다시 백수가 되었다. 이번에는 엄마의 뜨거운 기름 같은 잔소리에 따끔한 화상을 입지 않으려고 머리를 조금 썼다. 전공을 살리는 일을 찾겠으니 잠시 공부할 시간을 갖겠다며 논술지도사 자격증에 도전했다. 뭔가에 도전하고 열심히 매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목적이었던 공부였다. 민간에서 발급하는 자격증이었고 얼마간 머리를 쓴 덕에 1급 자격증을 따냈다. 이제 이걸로 버틸 만큼 버텼고 또 일을 구할 때가 되었다. 심란했다. 마음은 아무렇게나 헤집어 엎은 진창이었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 당장 죽어도 없어진 티가 조금도 안 나는 인간, 오히려 있어서 폐 끼치는 인간'이었다. 매일 당장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없어지고 싶었다. 밑바닥의 밑바닥을 갉아먹는 벌레로 변태하는 나에게 언니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우리 학원에 데스크 자리가 빈 지 좀 되긴 했는데, 너 해볼래?" 거의 즉답으로 하겠다고 했다. 친자매와 한 직장에서 일하는 건 역시 좀 특이한 경험이었다. 거기 다니는 학원생들도 재미있어 했다. 나도 멋모르는 천진한 초중고생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일하는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그곳에서 6개월을 함께 일하고 자그마한 계기로 언니와 함께 같은 직장을 그만두었다. 어쩐지 언니를 나의 루트에 물귀신처럼 끌어들인 것 같았다. 언니는 이제껏 성실하게 살아와서 백수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나도 전과 같은 백수생활로 도돌이표하지 않게 되었다. 언니의 추진력에 힘입어 함께 운전면허도 따고 한국어 강사 공부를 시도하려다가 시험날짜와 맞지 않은 걸 뒤늦게 알고 취소하는 바람에 얼마 없는 돈을 축내기도 했다. 그러곤 결국은 언니의 등에 업혀 인생 계획에 전혀 없던 교습소를 함께 운영하게 되었다. 언니는 죽어도 싫다고 했다. 나는 언니에게 이 방법밖에 없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했다. 지금에 와서야 내가 참 뻔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가 나를 업어주지 않으면 나는 갈 데가 없어!'하는 소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중간에 나도 따로 일을 구하려고 면접을 보러 다녔는데 언니와 함께 일하던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던 비슷한 이유에서 다른 직장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언니와 내가 함께 자영업을 하면 우리가 가진 핸디캡(종교적인 문제)때문에 눈치를 보고 제약을 받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게 내 주장의 근거였다.

  언니는 백기를 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상가를 알아보고 허가증과 등록증을 발급받고 홍보 전단지를 만들고 간판을 걸고 인테리어를 하고 커리큘럼을 짜고 하며 처음으로 능동적인 일을 벌였다. 언니는 늘 그렇게 해왔고 나는 소심증 때문에 혼자서라면 죽어도 발로 뛰지 않았을 일들을 해나갔다. 실패에 대한 공포가 남들보다 엄청나게 큰 나는 밖에서 만난 사람에게는 내 성격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성격과 더불어 개인적인 의견도, 솔직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누구와든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고, 적당히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고,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아 내 생활을 침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평소에는 워낙 잘 웃기 때문에, 또 하자는 대로 잘 따르기 때문에 소속된 곳에서 잘 어울리며 튀지 않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이런 나라서, 아이처럼 여전히 세상이 두려운 사람이라서 언니와 또 갈라지게 되는 일이 생기면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지금도 언니의 등에 업혀 간신히 사람답게 살고 있다. 교습소는 언니의 일터이고 나는 이 울타리에서 보호를 받는 중이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신문사에 취직할 뻔했다가 예의 핸디캡 때문에 스스로 물 먹인 적이 있다. 다시 전공을 살릴 만한 무슨 일을 찾아야지 않나 싶다. 아마 알아서 능동적으로는 못하고 선택을 해야만 하는 벼랑 끝에 서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와야 울며 겨자먹기로 뭔가를 시도할 것 같다. 버나드 쇼가 앞선 시대에 태어나서 다행이다. 때로 버나드 쇼를 생각하며 조금 위안을 갖는다. 엄청나게 내성적인 사람이었다는 버나드 쇼도 어려운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끊임없이 낯설고 두려운 도전이 도사리고 있는 이 어려운 인생을 말이다.

  매일 글을 쓰고 글을 읽고, 평범하게, 사람답게 사는 법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나다. 인간으로 변태하기 위해서 날마다 조금씩 허물을 벗는다. 그게 내가 요즘 교습소에서 하는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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