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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감옥

누구에게도 없었던 사람

  갈래길에 서서 '가지 못한 길'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갈까? 아니면 저쪽?' 오른쪽 길을 따라 한참을 가면 초등학교가 있다. 아주 한참을 걸어야 나온다. 적어도 20분은 걸어가야 한다. 왼쪽 길은 어쩌면 개인 사유지인지도 모른다. 트랙터가 길을 반쯤 막고 있어서 남의 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좁은 길 뒤편에서 새가 지저귀었다. 나는 그 길로 들어섰다. 정오가 조금 지난 한낮이었다. 옛날에는 이 동네에도 배가 들어왔었다는데 바닷길을 막고 농사 짓는 땅으로 개간을 해놔서 물은 볼 수 없었지만 여전히 바닷가 마을처럼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어깨에 닿는 머리카락이 바람 부는 대로 구불구불 엉키고 헝클어졌다. 길 안쪽은 해가 잘 들지 않아 어두웠다. 바깥에 우두커니 방치된 트랙터가 지나온 길마다 바닥에 흙뭉치가 떨어져서 발걸음을 방해했다. 길은 언덕으로 향했다. 둥글고 가파른 언덕 위에 묘지가 보였다. 그리고 묘지 근처에 선 나무가 유독 이질감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나무가 아니라 고라니였다. 짧은 몸통을 돌려세워 이미 달아날 태세를 해놓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고라니라니. 가만히 바람따라 가지를 흔드는 나무와도 다르고 사람과도 다른 기운이었다. 동물이 뿜는 기운은 사람과 같지 않아서 나는 그놈을 보기 전부터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있었다. 고라니는 오동통한 허벅다리를 탄력적으로 튕기며 길이 나지 않은 나무 숲으로 달아났다. 다시 홀로 남겨진 자리에 잠시간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뭇가지에 달린 나뭇잎이 바람결에 부딪히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으나 해 아래 서있는 내게는 이곳이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누구의 사유지인지도 모를 빈 언덕에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도 어둡고 조용한 공간에 혼자 있기가 무서워졌다. 이런 곳에 혼자 있다 변을 당하면 속수무책이었다. 비명도 한 번 못 지르고, 질러도 누가 듣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해를 입을 것 같았다. 1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날의 나를 떠올리니 참 불쌍했다. 멀리 떠나가도, 한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돌아와도, 새로운 길을 탐색해도, 유난을 떨어도, 청승을 부려도, 기나긴 사색에 잠겨도 헛되고 헤픈 짓거리로 귀결되었다. 어떻게 해도 내가 꿈꾸는 이상에는 못 미칠 가난한 흔적들이었다. 행운의 버스에 턱걸이로라도 동승했으면 싶어 했던 온갖 꼴불견의 퍼레이드였다.

  먼 동이 틀 무렵, 자매들과 송정해변으로 달려갔다. 해안가 모래사장이 삐딱하게 북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우리는 남향으로 서서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셋은 다같이 유난을 떨었다. 아직 날이 얼어붙은 겨울에 추위와 대결이라도 하자는 듯이, 먹어가는 나이와 검불 같은 머리카락과 새빨개진 코에 달랑달랑 매달린 콧물까지도 우리는 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동안에라도, 몸이 달달 떨리는 추위에 시달리는 동안만이라도.

  어느 방향에서도, 어떤 시간에도 찾아오지 않는 운명적 사랑이 이제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식물인지 기운만으로도 알아차리는 내가, 그때 그 사람이 사랑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속임수였는지 욕정이었는지 구별하지 못했다. '가지 못한 길'에 가면 사랑이 있을까, 가망 없는 희망에 두리번거리던 모습이 얼마나 볼썽사나웠을까? 다가오는 사람은 뿌리치고 오지 않는 사람은 기다리는 나를 이제는 누가 찾을까? 언젠가는 어둡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 혼자 고립되어 무슨 변고로 쓸쓸히 고독사를 당하게 되어도 속수무책이지 않을까? 말 그대로 나는 누구에게도 없었던 사람이 된다. 스스로를 가두고 어디에도 정 붙이지 않고 살았던 사람의 말로이다.



쓰고 싶은 대로 써지지 않는다.

글쓰기가 녹록지 않다.

답답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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