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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고 있는 일

주의사항 : 이건 매우 슬픈 글이다.

  아주 바보 같은 부류의 사람은 바로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이다. 우리는 속마음을 감출 줄도 모르고 감추는 것 자체를 아주 싫어한다. 거기에다가 큰 강박증이 하나 있는데, 우리는 모든 일이 다 잘 되어가고 있다는 듯이 굴고 싶어한다.

  이 강박증은 내가 가장 강하게 갖고 있다. 일이 꼬여가고 그래서 심사가 잔뜩 뒤틀려도 절대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 '아직 나쁘지 않아. 아직 괜찮아.' 생각과는 달리 숯검댕이 같은 스트레스가 이미 속마음에 까맣게 들러붙어 있다.

  '괜찮지가 않잖아. 기분이 더러워! 아주 드러워 죽겠어!' 최근에야 이런 생각을 솔직하게 느낀다. 솔직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이는 건 나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일이 잘못 되어간다는 걸 두 번째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일이 잘못 됐다는 건 문제가 복잡해졌다는 뜻이고, 복잡한 문제는 스트레스로 직결된다.

  거지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나는 늘 행복하고 긍정적인 기분으로, 웬만하면 좋게, 원만하게 지내고 싶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영역도 최소한으로 참견하고 나의 영역을 지키고 유지시킨다. 내 의견이 100%(100%라는 건 없지만 문맥상) 옳은 줄 알아도 반대 의견이 나온다면 끝까지 고집하지 않는다. 모두가 공평한 분량을 갖고 자기가 가진 분량에 만족한다. 덜 갖고 싶다고, 더 갖고 싶다고 투정부리지 않는다. 나에게 중요한 건 모두가 대등한 위치와 역할과 만족감이다. 그러나 모두 대등하게 가졌음에도 불만을 표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 분위기를 흐리고, 아니면 단지 의견이 다른 것만으로 열을 내거나 꽁하게 있는 식으로 분위기를 망친다면 '모든 일이 다 잘 되어가야만 해.'라는 강박증이 발동한다.

  강박증은 많은 스트레스를 가져 온다. 이기적인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정상적으로 굴도록 통제하지 못하면 바지 지퍼를 열고 다니는 사람을 본 것처럼 갈등과 불안에 사로잡힌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겪어본 바에 따르면 보통의 사람들은 못 본 척하는 게 최선이었다. 와중에 목소리 크고 이기적인 사람이 다른 이기적인 사람을 보고 직설적으로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당장은 속이 시원해지지만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상황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딜레마이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사람에게 훈계를 두는 것도 그다지 정의롭지는 않아 보인다.

  강박증은 또한 항상 정직하고 솔직하고 싶어 한다. 누군가를 속이기도 싫고 나 스스로도 '그런 척'하고 넘어가는 게 굉장히 불편하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게 하는 행동을 한다면, 그 행동이 의도적이었다고 해도 처음부터 의도적인 나쁜 행동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 행동을 참는 시간이 '의도적'이라는 증거나 명분을 모으는 과정이랄 수도 있다. 마지막에 가서 "너 이쯤되면 의도적으로 나를 괴롭힌 거잖아."하고 큰소리를 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내게 의도적으로 나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상하니까 '설마, 아니겠지.'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모 아니면 도로 깔끔하게 끝을 보진 않는다. 그럴 경우에 나의 비장의 무기가 바로 솔직함이다. "너 그동안 나한테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야? 되게 마음이 안 좋고 그렇더라. 일부러 그런 거니? 일부러 그랬다면 왜 그랬어?"하고 깊은 대화의 시간을 만든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불편했던 내 마음을 불특정한 '네가' 외면했다고 해서 나조차도 외면할 수는 없다. 내게는 고스란히 그 감정이 남아 있다. '너를' 볼 때마다 그 안 좋은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속으로 백날 '왜 그랬을까? 도대체 왜?'하며 머리를 쥐어뜯어도 고민은 해결되지 않는다. 즉시로 내 기분이나 의견을알려야 할 때도 있다. 상대를 위해서 내 마음을 잠시 뒤로 밀어두기로 결정했을 때에는 무덤까지 그 마음을 간직하면 된다. 그러나 때로는 과감하게 드러내야 할 때도 있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대등하기 위해서일 때이다. 아니면 때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 싶을 때도 그렇다. 상대의 무례함을 그 자리에서 반드시 짚어줘야 하는 타이밍도 분명히 존재한다. 상대의 무례함이 상대를 곤경에 처하게 할지도 모를 때에는 바로 알려줘야 한다. 혼내거나 비난하거나 독선적인 태도로 무안을 주려고 무례함을 지적해서는 안 된다. 상대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면 혼낼 수 있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엄하게 혼내야 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본인의 영역에 있는 것이지 '한 번 수치를 당해봐라.'는 심정으로 혼낸다면 상대에게 상처와 억하심정만 남길 것이다. 사람은 동화에서처럼 그리 쉽게 뉘우치고 잘못을 깨닫지는 않는다. 그런 평화로운 풍경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할 정도로 희소하다. 이렇게 나열한 경우 외에도 평소 생활 속에 겉마음과 속마음을 따로 두는 법이 없다. 그런데 이 점이 나와 우리 가족을 가장 바보 같은 사람의 부류로 묶는 핵심이다.

  어릴 적에 동화책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이라고 우스꽝스럽게 변명하기도 하지만 실은 그저 성향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불쾌한 감정을 오래 감추지 못한다.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고 그 문제 상황에서 어서 탈출하기를 바란다.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불쾌한 마음이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결국은 그 사람이 미워지고 싫어진다. 남이 싫어지고 미워지면 결국 불편한 사이가 되고 만다. 남이 그걸 원한다면 그 관계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 하지만 관계가 개선되고 좋아지길 서로가 원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과정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쌍방향이 일으킨 문제이든 일방적으로 한 사람이 잘못했든 잘못에 대해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게 정말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사과와 동시에 화해를 이루는 게 정식이다. 유야무야 없었던 일로 돌리고 '하하호호'하는 건 역겹다. 내가 잘못해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관계가 헝클어졌다면 오랜 생각 후에, 하지만 상대가 참을 수 있을 만큼 짧고도 오랜 시간 생각을 가진 후에 마음을 차분히 내려놓고 사과를 해야만 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너도 그럴 때 있잖아.'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건 저급하다고 본다.

  이런 방식이 정직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어려서부터 아주 많은 세상의 벽을 마주해야 했다. 수많은 상처를 받고 또 받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같은 상처를 수도 없이 받고 만다. 친구란 서로를 위해주고 서로의 마음이나 기분을 가장 보듬어야 할 존재라고 믿었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친구를 대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 친구사이가 늘 대등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오래 전에 배웠는데도 살갗에 닿는 경험을 할 때에는 또 다시 슬퍼진다. 나도 누구에게나 좋은 친구는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리곤 한다. 하지만 정말 둘도 없는 친구라고 여기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그 상처는 상처가 아니다. 그런 배신은 내 생애의 역사로, 충격으로 기록된다. 배신의 경험은 내 피부가 된다. 내 몸의 한 면적을 차지하게 된다. 한 마디로 나를 만든다.

  중년의 위기라는 말이 있는데 내게는 20대 후반에 크나큰 위기가 찾아왔었다. 아직도 위기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상태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직해서 바보가 됐다는 합리화를 하려는 건 아니다. 바보 같았기에 내 마음이 정직하기에만 급급했지 사람들의 진짜 속내를 객관적으로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사고방식이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나만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걸 멈추지 못하면 나는 계속 바보로 남게 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는 주변인이다. 내게 다른 사람이 주변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친구라 해도 남은 남일 뿐이다. 우리의 1순위가 '나'에서 변하지 않듯이 다른 사람의 눈에 주변인으로 비치는 내가 시시로 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서, 평가에서 보호 받고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타인에 대한 평가는 가차없다. 나도 그렇게 가차없는 평가 속에서 너저분하게 칼질 당하고 있을 것이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말이 새삼 생각난다. 아직 '영원한 적은 없다.'는 말은 경험하지 못했다. 소소한 경험 말고 뼈저린 경험은 하지 못했다. 일단 한 번 등 돌린 상대와는 극적인 화해를 이룬 적이 없다. 이것도 강박증 때문이다. 한 번 아니면 영원히 아니라는 강박증이다.

  그러나 이 우울하고 염세적인 더러운 경험들이 모조리 강박증 때문이었을까? 이제 와서 내가 알 수 있는 건 나도 흔해 빠진 바보 같은 인간이었다는 평범한 깨달음과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미지의 이치이다.

  그나저나 나한테 더러운 짓거리를 한 그 쓰레기 새끼는 아직도 젖은 옷 잘도 입고 다니나 모르겠다. 말릴 생각도 없고 빨 생각도 없어 보이던데, 무겁고 축축한 죄책감이 쉽게 벗겨지지도 않을 것 아닌가? 그래, 죄책감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물에 푹 젖은 옷을 입은 듯 찝찝하고 무겁지만 몸에 들러붙어서 잘 벗겨지지도 않지. 그런 채로 몇 년이나 더 버틸까? 한 번은 내가 벗도록 도와주려고 나서기까지 했다.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그 뻔뻔한 낯짝을 언제까지 봐야 할까? 죽을만큼 괴롭고 고통스럽다. "저 새끼를 죽여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무엇을 탓할 수도, 무엇에 기댈 수도 없는 오도가도 못하는 내 신세, 그야말로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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