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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맑음

  스무살의 첫 여름은 설렘으로 꽃 피웠다. 1학기 종강을 앞두고 연달아 기말고사를 보느라 시간은 바쁘게 흘러갔다. 방학동안 다녀야 할 알바를 미리 찾아봐야 했고 조별발표 준비도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왔다. 시험 대신 과제제출로 대체한 과목이 있어서 부랴부랴 밤샘 레포트 작성까지, 방학을 맞이하려면 이 정도의 고생은 감수해야 했다. Mp3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어야 그나마 심신이 안정되었다. 시험을 보거나 친구들과 점심을 먹을 때 빼고는 항상 음악이 필요했다. 학교를 오가는 버스 안에서도, 시험공부를 하던 중앙도서관에서도 음악을 들었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은 미스티블루의 '날씨맑음'을 연속으로 재생해놓았다. 깨작깨작 책에 밑줄을 그으면서도 어쩐지 가슴 한쪽에 콩알만한 심장이 하나 더 생긴 듯 조그맣게 콩닥거렸다.

  제2 외국어 교양수업이 종강한 날이었다. 먼저 시험을 마치고 볼일이 남아서 강의실 앞에 남아 기다리던 내게 스포츠 머리를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시험 잘 치셨어요?" 말을 건 남자의 얼굴을 3초간 바라보았다. 일면식도 없는 내게 말을 걸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였다. 대학에 들어와서 말을 거는 낯선 사람은 주로 '도를 아십니까?' 계통의 인간들이었다. 멀끔하게 생긴 남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언젠가 쉬는시간에 한 번인가 눈을 마주쳤던 날이 떠올랐다. 그는 어쩌다 눈이 마주치자 뒷머리를 긁적였었다. 아, 그도 친구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까 고민이 되어서 또 2초간 가만히 있었다. 아직 1학년이었던 나는 시험공부를 그리 열심히 해두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이 더 큰 고민이었고 하루하루 등교를 하는 게 기적이었기에 학업에 관심을 가지기까지 하면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날 태세였다. 고개를 저으며 "그저 그래요."라고 대답했다. 남자는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는 별로 내 취미가 아니어서 조금 불편해졌다. 그 사이 같은 학과 친구가 막 시험을 마치고 나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우리 대화를 옆에서 듣다가 곧 자리를 떠났다. 싱거운 사람이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도무지 강의실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고 친구가 학생회관에서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 갈피를 잡고 학생회관으로 향했다. 아까의 스포츠머리 남자가 1층 입구 그늘진 곳에 있었다. 밖이 많이 더운가? 화창한 6월 초순이었다. 해가 많이 따가워지긴 했지만 바람은 아직 시원했다. 밖으로 나오는 나를 남자가 흘깃 쳐다보았다. 낌새가 수상했다. 그러더니 내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허리치수가 큰 바지를 입고 와서 뒤따라 걷는 남자가 신경쓰였다. 걸음을 천천히 걸으면 앞설까 싶어서 속도를 늦췄다. 남자가 나를 불러세웠다. "저기요!" 무슨 일일까? 바지가 흘러내리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이게 무슨 망신이야! 이제 대학 새내기인 스무살 꽃다운 여대생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혹시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어요?" 그의 말을 잘못 들은 것 같다. "네?"

  우리는 그 자리에 한참 붙박인 채 서서 실랑이를 벌였다. 그의 구애는 특별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적이 처음이라고 했다. 정말인지는 몰라도 휴대폰을 들이민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학생회관을 돌아보자 친구가 이미 와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같이 손을 흔들었다. "죄송해요. 친구가 기다려서 얼른 가봐야겠어요." "정 안 되면 저하고 친구라도 되어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가 굉장히 절실하게, 아주 공손하게, 그러나 매우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섰다. 그럴수록 곤란함도 배가 되었다. 자꾸만 뒤돌아 친구에게 구조신호를 보내어도 친구는 알아듣지 못하고 멀리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할 수 없이 남자의 손에 든 휴대폰을 슬쩍 가져가 번호를 찍어주었다. 남자는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는지 놀라서 "앗!" 소리를 내었다. 그는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쯤에야 나는 그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그가 또박또박 자기 이름을 알려주었고 내 이름도 아시냐는 질문에 당연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서 문자와 전화가 왔다. 이런 식으로 연애를 시작할 수도 있었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번호를 알려달라는 남자들이 쫓아왔었고, 또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만난 사람들이 적잖이 호감표시를 해왔다. 그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고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맑은 날씨를 누릴 수도 있었다.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지만 내 상황은 달랐다. 누구를 책임지고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인연을 만들어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신에 나는 음악을 틀었다. 즐겨듣던 음악에 추억과 기억을 저장해두고 들을 때마다 불러냈다. 마음은 스무살, 정처없이 이유 모를 설렘으로 가득하고, 이유 모를 시간으로 바쁘게 보내던 그때와 변함이 없었다. 하루종일 기대에 차서 두근대는 마음으로 거리를 누비지만 왜 그런 이유만으로 시간을 낭비했던 걸까?

  스무살인 내게 처음 말을 걸었던 낯선 청년이 가끔씩 떠오른다. 그러면 동시에 '날씨맑음'이 어딘가에서 재생된다. 아름다웠고 어렸고 예뻤으나 생각이 너무 많았다. 집적대는 남자들에게 거리를 두면서 한편으론 저 맑고 파란 하늘을 같이 바라보는 누군가를 상상했다. 두둥실 부풀어오른 마음은 잿빛 일상이라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날의 기분이 언제라도 음악만 틀면 비슷하게 샘솟는다. 젊음을 누군가와 공유하지 못한 게 안타까울 때도 있다. 덕분에 인생은 덜 복잡해졌다. 새로운 연을 맺지 않아도 갈등상황은 충분히 겪으며 살았다. 그냥, 떠올릴 수 있는 젊음이나, 그리운 마음이 드는 옛 기억이나, 그날들을 온전히 불러일으키는 노래가 가만히 턱을 괴고 눈을 감게 한다. 그냥 그런 기분에 푹 젖어보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게 오늘이었다. 작은 소나기가 내리기도 하고 하얀 구름이 몽실몽실 피어난 파란 하늘에 노을이 길게 다리를 뻗은 오늘 같이 맑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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