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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

믿음이라는 것이 절실해야만 생겨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흔하다. 절실함에는 급박한 상황을 포함한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어쩌면 그런 흔한 착각은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한다. 말하자면 믿음은 그만큼 매우 강한 동기에서 출발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알고 있는 추상 중에서도 강력한 힘이나 원동력을 갖고 있다는 말도 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믿음이 반드시 절실함에서부터 오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가 그 경우이다. 나의 믿음은 발광과 염세와 반골에서 역류해왔다.

만일 나에게 하루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저 그 하루를 살아볼 터이다. 뭐 어떤 고민이나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살려고 한다. 또는 3일이 주어진다 해도 그 3일을 굳이 하루씩 세 번으로 쪼개지 않고 3일을 몽땅 하루 살 듯이 살 것이다. 그게 내 방식이라면 방식이랄 수도 있다. 하지만 뭐라고 이름 붙일 건더기는 아니다. 그냥 뭐라도 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내게는 방해가 된다는 말이다. 어설프고 우스운 꼴이다.

삶은 실제로 밀어내는 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앞을 가로막은 벽을 밀어낸다. 밀어낼수록 보이지 않던 풍경이 옆으로 지나쳐간다. 이미 본 풍경들은 발자국만을 남긴 채 점점 뒤로 멀어져간다. 하지만 뒤를 볼 새가 없다. 여전히 나는 내 앞을 가로막은 벽을 밀고 있는 중이다. 이 밀어내는 식의 삶에 뭔가를 덧대고 덧칠한다는 게 어쩌면 시간낭비이고, 어쩌면 어색한 일이 될까 걱정스럽다. 그래서 이틀이든 사흘이든 밀고, 밀고, 어쩌면 조금 이따 더 이상 앞으로 밀어지지 않는 진짜 벽을 마주할지 몰라도, 실은 바로 그 날을 위해 이렇게 밀어내는 중일 테니 그만둘 수가 없다.

이런 삶에 절실함을 갖다 붙이기는 좀 민망하다. 2%의 절실함도 절실함이라 한다면, 그럴지라도 난 더 신경 쓰지 않겠다. 뒤를 뭔가가 쫓고 있는 일상은 어디에도 없다. 급박함이 외부에서 던져주는 도전의식이라면, 나의 내부를 진동하고 있는 이것은 뭐라고 해야 좋을까? 제 꼬리를 잡으려 빙빙 도는 개나 고양이 등을 상상해보면 쉽다. 나는 이런 삶을 예견한 적도 없고 갈망하지도 않았었다. 가만히 벽이나 밀고 가던 무일푼의 한량이었다. 뭔가가 나를 흔들었다고? 그 말은 마치 이 세상이 ‘빅뱅’으로 인해 생겨났다고 하는 소리로 들린다. 뭔가가 나를 홀렸다고? 우연이나 예정론에 초점을 맞췄다면 번지수가 틀렸다.

혹시나 내가 틀렸을까 싶어 뒤를 돌아본 적도 없었느냐면, 나는 ‘오류’ 그 자체이다. 돌아본다 하여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곧바르게 걷는다 해서 이제는 ‘옳음’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게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류’가 나를 관통했다. 절대로 내 말을 믿으라고 하지 않겠다. 아니면 믿지 말라고도. 타인 역시 내 눈에는 ‘오류’다. ‘오류’가 ‘오류’를 더한다고 ‘옳음’이 될 것도 아니지만 더한 ‘오류’가 되지도 않겠다. 똥물에 똥물을 섞어도 똥물이듯이.

그러니까 나를 흔든 게 나의 오류 때문도 아니고, 나의 절실함 때문도 아니고, 외부의 자극 때문도 아니었다. 동기는 강하지도, 아주 없지도 않았다. 동기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내가 앞을 볼 수 없게 가로막은 벽에서부터 나타났다.

앞을 볼 수 없다는 장애는 자연스러우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다. 밀어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그 앞의 주변 풍경들이 나를 자꾸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밀어내면서 내가 줄곧 생각해온 것들은 내가 지나쳐온 풍경에 대해서였다. 기다리게 해서 기다려왔던 일들이 뒤로 밀려나는 모습은 하나의 큰 그림이자 충격이었다. 벗어난 이후에야 보이는 큰 그림과 사건과 거기에서 헤어 나온 후에 받게 되는 충격. 영원이란 이런 것일까?

실마리라는 것은 없었다. 그것들도 몽땅 ‘오류’였다. 모든 사건들은 내 앞에, 밀어내는 벽 너머에만 있었다. 지나간 일들이 다 그 앞에, 보이지 않는, 가려진 그 사건들을 위해 존재했다. 그리고 모두 지나간 뒤에야 큰 그림은 거대한 몸뚱이를 조금씩 드러냈다. 삶의 이러한 방식은 결국 누군가를 위했던가?

내가 알아낸 것은 아니지만, 기어코 나도 알아낸 진실이 이 부분에서 나타난다. 삶의 이러한 방식은 결국 누군가를 위했던가? 맨 앞으로 돌아가서, 그게 바로 믿음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벽을 밀어내도 우리는 시간 안에 존재했다. 그러나 언젠가 벽이 세워질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도 제한 속에 있다는 말이겠군.’ 나의 존재를 위해서도, 이 모든 존재를 위해서도 믿음이 필요했다. 내가 믿음을 필요로 한 순간부터 알았다. 믿음은 필요로 하는 존재들에게만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믿음이 필요치 않은 존재들에게 여전히 이 세계가 암흑덩어리의 미스테리와 미지와 불안과 동요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그 아무것도 강요하고 억지로 먹여 삼키게 할 수 없다.

밀어내는 삶을 모두가 똑같이 살아가고 있지만, 나의 반골기질은 오히려 나를 넘어뜨려, 내가 나에 대한 의문과 불신으로 멍청이가 되려 한 순간 믿음이 빛을 발했다. 사람들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에게 배신을 당할 때 엄청난 상실감과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그 자극점이 최대치로 발휘되는 때가 바로 내가 나 자신에게 배신당하는 때가 아닐까? 절정에 치달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순수하게 믿어온 한 사람이 결국 자기 자신의 모든 판단과 결정으로 인해 멸망하게 된다면 완벽하게 패닉에 사로잡힌다 해도 모자랄 것이다.

믿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조용히 당신의 지나간 인생을 되짚어보라. 실로 믿음이 당신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때로 인생은 잔인했고 고달팠고 말할 수 없이 서글펐다. 또 그것을 모두 일소시키고 잊게 할 만큼 놀라운 경험도 있었다. 그것들이 다 축적되고 남은 뒤의 여생은 어떠한가? 여전히 당신을 동요시킬 만한 여지가 남아있지 않은가?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자극이 아니라 내부를 혼동시키는, 당신의 무지, 당신의 오류, 염려와 회한, 미련, 그리고 이제는 끝에 다다른 미래를 향해가던 벽.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갔을까? 살아가는 기술을 위해 살아갔던 건 아닐까? 그 기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당신이란 존재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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