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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학교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대형버스가 어두운 밤의 도로를 달렸다. 도로를 밝히는 건 버스에 달린 헤드라이트에 두 불빛뿐, 이 도로와 건너편 도시 사이를 흐르는 강물 위에 높고 낮은 빌딩에서 반사된 빛이 거울처럼 선명하게 비쳤다. 버스 창가에 팔을 올려 턱을 기대고 노아는 잠시 딴 생각에 빠졌다. 도로 위에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차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반대편 차선의 차들은 퇴근을 하는 건지 출근을 하는 건지,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감상에 빠져 검은 물을 바라보았다. ‘양갱이 먹고 싶다.’ 검은 강물을 눈으로 보기에 미끈거리는 촉감을 상상하며 잘 먹지도 않던 음식을 떠올렸다. 옆자리에 있던 데몬이 양갱의 포장을 벗겨서 노아의 손에 쥐어주었다.

   “곧 있으면 도착해. 그곳에 가면 이소의 생각을 우리가 더 잘 알 수 있게 될 거야.”

  노아는 초점 없는 눈으로 양갱을 한 입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몬이 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인승의 대형버스는 ‘메론 중학교’에 도착했다. 노아는 이 차에 함께 탔던 수많은 승객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강을 지켜보던 중에 이미 터미널에서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리는 동시에 그녀는 버스에 대해서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노아의 눈앞에 익숙한 풍경의 학교가 나타났고, 머릿속엔 ‘한승현’ 한 가지 밖에 남지 않았다.

  노아와 데몬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발을 디딘 곳은 어떤 교실의 문 앞이었다. 처음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노아가 승현이를 떠올리자마자 복도와 교실, 화장실 어디에나 번잡스럽게 소란을 떠는 아이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노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아이들의 얼굴을 살폈다. 하나 같이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적 있는 얼굴들이었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만났다가 헤어진 아이들은 여전히 몸도 얼굴도 초등학생의 해맑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만난 여자 친구들도 눈에 띄었다. ‘메론 중학교’인 만큼 노아의 중학교 동창인 친구들의 얼굴도 다수 보였다. 기다란 막대기를 한 손에 들고 옆구리에 출석부를 끼고 교무실로 돌아가는 선생님도 보였지만 노아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노아는 자신이 어려진 게 아닌가하고 착각했다. 시험대형으로 일렬로 놓인 책상 중 한가운데에 앉으며 모두의 얼굴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몇 아이들도 노아를 신기한 눈으로 보며 다가왔다. 이 자리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은 단연 노아였다. 그녀가 다시 이곳에 돌아온 것이다. 노아가 혼자 나이를 먹고 시간 속에 스며들어 사는 동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영원히 이곳에만 존재했던 것처럼 예전 모습 그대로 살고 있었다. 남자 아이들이 노아에게 장난을 걸어왔지만 이미 중학생 때보다 마음이 성숙해진 노아는 그들의 장난이 호감 표시인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전보다 따뜻한 표정으로 웃으며 그들의 장난에 받아쳤고, 남자 아이들은 노아의 새로워진 모습에 더욱 호감을 느꼈다.

  노아는 눈알을 굴리며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 승현이가 없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노아의 시야에서는 그 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승현이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노아는 승현이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려 애썼다. 왠지 그렇게 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승현이가 나타날 것 같았다.

 

벌써 2년이나 지난 일이다. 노아의 생일이었고, 하나뿐인 그녀의 단짝 친구 미담이가 노아에게 생일선물을 건넸다. ‘곱창’이라고 부르던 머리끈이었다. 노아는 왠지 모든 반 친구들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구질구질해 보일까봐 괜히 겁이 났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매일 팔던 ‘곱창’을 생일선물로 받다니. 노아는 늘 그 머리끈이 맘에 든다고 미담이에게 말하곤 했지만, 다른 여자애들은 촌스럽다고 생각했을 것만 같다. 노아는 떨리는 손으로 미담이가 주는 머리끈을 가져가 만져보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다시 선물을 돌려주었다.

“미담아, 나 지금은 받기가 너무……. 좀 그래. 학교 끝나고 집에 갈 때 주면 안 돼?”

노아는 정말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조심스럽게 말했고, 그 바람에 미담이는 기분이 상해 입을 꾹 다물고 자리로 돌아갔다. 노아는 별나게 구는 자신을 책했다.

‘왜 그랬을까? 다른 애들처럼 그냥 고맙다고 받아도 되는데 왜 괜한 짓을 했을까?’

 

다음 쉬는 시간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있던 승현이가 노아에게 다가와 물었다.

“펜 좀 빌려줘. 다음 시간 필기해야 하는데 펜이 망가졌어.”

노아는 승현이의 눈도 보지 못하고 재빨리 필통에서 가장 좋아하는 펜을 꺼내 승현이에게 빌려주었다. 노아의 머리 위에서 승현이가 고맙다며 코에서 바람 새는 소리의 웃음을 흘렸다. 노아는 승현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필통을 꼭 쥐었다. 그리곤 하루 종일 떨리는 가슴을 추슬렀다. 종례시간이 끝나고 가방을 챙길 무렵 승현이가 노아에게 빌린 펜을 돌려주었다. 노아의 펜 뚜껑 걸이 부분에 리본 핀이 꽂혀있었다.

하굣길에 교문을 나서는 노아를 멀리서부터 보고 달려온 미담이가 붙잡아 세웠다.

“한승현이 주는 선물은 괜찮고 내가 주는 건 창피해? 맘에 안 들면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 어쨌든 이거 너 가져!”

볼이 빨개져 화를 내고는 미담이는 제 집 쪽으로 뛰다시피 멀어져갔다.

 

  남자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노아의 머리에 리본 핀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손목에는 하늘색 머리끈을 팔찌처럼 차고 있었다. 그녀에게 먼저 다가온 것은 미담이었다. 생글생글 웃는 동그란 얼굴을 마주보며 노아는 울먹임을 참을 수 없었다. 노아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늘 이 하늘색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미담이와는 얼마 안 되어 다시 사이가 좋아졌지만 학년이 올라가고 반이 갈리면서 차츰 멀어져 인사도 하지 않는 친구가 되었었다. 그랬던 미담이가 이 교실에서만큼은 예전처럼 친하게 굴며 노아의 두 손을 맞잡고 친근하게 웃어주고 있었다. 노아는 그때도 말하지 못했던 말을 미담이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머리끈 맘에 든다. 고마워.”

  미담이가 배시시 웃으며 노아의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뒤를 돌아보자 낯익은 머리통이 책상에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고 있으니 까칠까칠한 검은 빡빡머리가 떨리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만화책을 올려놓고 보면서 낄낄 웃고 있는 승현이였다. 노아의 얼굴이 단숨에 붉어졌다. 승현이가 만화책을 뒤집어 덮어놓고 노아를 보았다.

   “안녕, 노아야.”

  노아는 천천히 뒤돌아 앉았다. 승현이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며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앳된 얼굴을 다시금 새롭게 보고 있었다. 2년 전 승현이의 까만 눈동자는 이처럼 빛이 어려 반짝였었다. 승현이가 손을 들어 노아의 머리 위로 가져갔다. 손가락으로 리본 핀을 살짝 톡하고 건드렸다. 승현이가 노아를 보며 웃었고 노아도 그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데몬이 노아의 잠옷 자락을 잡아당겼다. 노아는 이제 정말 일어나고 싶지 않아졌다. 데몬이 노아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에게 침이라도 뱉고 싶어졌다. 노아는 서글픈 눈으로 데몬에게 끌려 교실 밖으로 추방당하고 있었다. 노아는 끝까지 승현이의 맑고 까만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런 노아를 향해 승현이는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교실 문이 닫혔다.

   “다시 들어가도 아무도 없을 게 분명해.”

  노아가 닫힌 교실 문 앞에서 울먹이며 말했다.

   “그래도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아냐. 아까 그대로 멈췄어야해.”

   “이소, 멈추는 건 불가능해.”

  데몬의 말에 노아는 중얼거리듯 혼잣말했다.

   “아니, 난 노아야.”

   “맞아, 넌 이소야.”

  데몬이 노아의 손을 잡았다. 노아는 다시 어딘가로 가야만하는 것이다.

   “왜 난 여기 가만히 있고 싶지 않을까?”

  노아가 말하며 데자뷰(deja vu)를 느꼈다. 뭔가에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데몬이 뭔가를 말하려다 말았다. 노아는 데몬이 무슨 말을 하려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곧 데몬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데몬을 믿었어. 데몬 없이 나 혼자 여기 오는 건 불가능했을 거야. 내가 바라는 대로 데몬은 다 해준 거지?”

  데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왜냐하면…”

  노아가 입가에 서서히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건 내 꿈이니까.”

  데몬이 노아와 똑같은 미소를 짓고 가만히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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