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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독서 중

  아무튼 바로 얼마 전에 호텔 로비에서 잠깐 동안 만난 사람에 관한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아니, 그 누구든 간에 그 사람에 관한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첫인상이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화음이 우리에게 베토벤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 또는 하나의 붓 터치가 우리에게 보티첼리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너무 변덕스럽고 너무 복잡하고 엄청나게 모순적이어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듭 숙고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은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겪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관한 견해를 보류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에이모 토올스, ‘모스크바의 신사’ 중 194쪽 마지막 단락-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 이후로 또 다시 진도가 나가기 힘든 책을 접했다. <하얀 성>과 함께 끝까지 읽을 수는 있지만 빠르게 읽히지는 않았던 책이 될 것 같다. 읽다가 중도 포기한 책도 많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프란츠 카프카의 <성>이 몇 년째 찔끔찔끔 읽다 말다 하며 반 포기 상태인 도서 목록이다. 이중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저 표지만 자주 보며 소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몸이다. 나머지는 상당히 읽기는 했는데 도저히 끝까지 읽어보고자 하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더 긴 여유를 기다리며 남겨두었다. 이외에도 <브로덱의 보고서>, <미사고의 숲> 등 내 예상과 다른 이야기 전개 때문에 잘못 산 책 목록도 꽤 많다. 잘못 샀으나 책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좋은 책이 주인을 잘못 만난 경우이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생일선물로 받은 두툼한 장편소설이다. 가장 좋아하는 선물이 바로 책이라서 포장지를 벗겼을 때 아주 반가웠다. 함께 받은 영랑시집 초판본은 펴기가 아까워서 살살 내용만 조금 확인하고 책장에 잘 모셔만 두었다. 어느 날 시가 읽고 싶을 때 자연스럽게 펴볼 셈이다. 에이모 토올스라는 작가의 <모스크바의 신사>는 요즘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이라고 한다. 표지도 멋있고 어느 한 인물이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라는 냄새가 제목부터 솔솔 풍겨왔기에 지체없이 책을 펼쳤다. 어려운 책은 질색이다. 대부분 쉬운 책은 인물 하나에 초점을 맞추니까 <모스크바의 신사>도 쉽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하얀 성>에 비유했듯이 이 소설은 아주 많이 지적이었다. 러시아의 역사는 생소한 분야였다. 러시아의 근대기로 접어드는 과도기를 배경으로 귀족 청년의 변모한 일상과 일생이 주된 줄거리였다. 그의 현재와 과거, 현재 주변인물과 과거의 주변인물이 그가 현재 처한 상황, 즉 금고생활 중인 그를 설명하고 그 시대를 설명해주었다.

  아직 1부까지 읽었기 때문에 2부에서는 신사가 어떤 일을 겪는지 모른다. 1부에서는 신사인 주인공이 자신이 받게 된 금고형을 신사답게 수용해서 살아간다. 그의 신사다움은 이미 정체성으로 내제되어 있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의외의 인물을 만나게 되고 급속도로 변하는 사회상과 더불어 그의 정체성도 꿋꿋이 버텨내기 힘들어진다.

  문제는 에이모 토올스가 왜 하필 러시아 변혁의 시대를 다루며 귀족 계급의 한 청년을 주인공으로 삼았느냐는 것이다. 의도가 무엇이고 목적이 무엇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이런 이야기는 흔한 편이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의 과도기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 근대소설에서는 흔한 소재 중 하나이다. 2018년에 러시아 근대기 귀족 청년을 다룬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그런 고민을 은연중에 하며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인용 문장은 1부를 읽는 동안 거의 간접적이었을 뿐인 인간론이 직접적으로 대두된 글귀이다. 간접적으로 상황이나 대화에서 생각을 읽게 되었던 동안의 피로를 풀어주는 대목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전체를 꿰어맞추기에 부족하지만 조금은 에이모의 생각을 쉽게 풀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살금살금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이 대목 덕분에 에이모에 대한 불분명한 평가가 급격하게 호감으로 기울게 되었다. 에이모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작가였다. 그건 위의 인용 문장이 뒷받침해준다. 어떤 사람에 대한 견해를 섣불리 단정 짓지 말고 보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말은 훌륭한 조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견해를 입밖에 내는 횟수도 적어야 한다. 사람의 견해는 대부분 사람에 대한 견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에이모는 이런 조심성을 험악한 비유 대신 베토벤과 보티첼리를 들어 제안한다. 매우 극단적인 비유 선택이었다고 본다. 대체로 부정적인 제안에는(~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을 하지 말자 등) 부정적인 비유나 근거가 사용될 법도 한데 가장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재료를 예시로 썼다는 점이 그렇다. 그래서 훨씬 부드럽게 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게 된다.

  이러한 풍모는 1부 전반에서 흐르고 있다. 문체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예민하지 않고, 부드럽고도 온건하다. 그 힘은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드나드는 늦봄의 온풍과도 같다. 이른 아침, 찬 기운이 스민 방안에 슬며시 불어들어오는 봄바람은 거부하는 것은 둘째치고 그 따뜻한 손길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현대인이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배울 것은 많다. 신사의 품격과 정서를 잃은 시대는 '미루어 생각'하는 미덕이 없다. 그렇기에 관계의 형성은 쉽고 간편하며 급히 해체된다. 사람은 공들여 만들어지는 존재임에도 길고 긴 과정은 생략한 채 실리를 추구한다. 신사의 점심 메뉴는 간단하게 정해지지 않는다. 신사의 대화 주제는 관계성과 관련이 깊다. 의미 없는 식사와 의미 없는 만남, 소비를 위한 소비를 하지 않는다. 아침 일과와 점심 일과, 저녁 일과는 의도적인 짜임새가 있다. 삶은 파란만장하여도 존재는 흔들리지 않는다.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음악을 들어도 전연 다른 인간이 형성되는 이유이다.

  신사는 선택의 순간을 가벼이 흘려보내지 않고 심사숙고한다. 즉흥적인 선택도 그이기에 가볍지 않다. 차분히 <모스크바의 신사>를 글로 정리해보니 이 책을 읽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생긴다. 더불어 2부부터는 에이모가 자기 견해를 조금은 쉽게 풀어 말해주었으면 한다. <하얀 성>보다는 이해가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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