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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주택가

  노아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인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좀체 이성을 다스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언덕 위를 신나게 달리다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하늘을 날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날아본 적 없는 그녀가 공중에서 떠다닌다는 게 정확히 어떤 기분일지 알 리가 없었다. 노아의 몸이 집이나 빌딩보다 더 높은 곳에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지상에 몸을 대고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결국 노아는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순간의 짜릿함과 두려움이 노아의 정신을 장악해버릴 뻔했다. 노아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항상 데몬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어디서나 노아가 찾는 위치에 데몬이 있었고 그는 거기 서서 빙긋 웃어주었다.

  노아와 데몬은 낯선 주택가 골목길 한 가운데를 누비고 다녔다. 낯선 동네이기는 하지만 도심지라면 있을 법한 언덕배기에 붉은 벽돌로 지은 집들이 첩첩이 겹쳐져 있는 주택 밀집 지역이었다. 이런 동네는 언젠가 한 번 지나쳐보기도 했고 사진이나 TV에서 본 적도 있었다. 이런저런 기억의 짜깁기로 만들어진 노아만의 동네였다. 노아는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러 누가 사는 집인지 확인했다. 그리곤 평범한 주민들이 문을 열어주며 노아를 반길 때마다 그녀는 실망스런 한숨을 쉬었다. 노아는 최대한 기억을 짜내어 그녀가 원하는 인물이 문을 열어주길 기대했다. 아주 잘생겼거나 한때 그녀가 사랑했거나 아니면 반대로 미워했던 사람들. 노아는 누군가에게 키스를 퍼붓거나 주먹질을 해대고 싶었다.

  노아는 몇 군데의 집을 더 들른 후에야 데몬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봤다.

   “데몬, 도저히 안 되겠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집에서 모르는 아줌마, 아저씨들 밖에 안 나와. 아니면 할머니들.”

  데몬이 입을 열었다.

   “주변을 잘 보면 알잖아. 이런 동네인걸.”

  데몬의 말에 노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간대가 문제인 모양이었다. 동네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아직 한낮이었고 젊은 사람들은 집에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노아는 일부러 이 시간대에 있으려고 했던 것이다. 깜깜한 밤에 골목길을 다니는 게 꽤 무서운 생각이라고 여겨 악몽을 피하기 위해 잔꾀를 내본 것이다. 시간대가 무슨 대수인지, 노아는 불러들이고 싶다면 아무렇게나 일을 벌이고 싶었다. 모든 것이 가능해야 하는데, 상황에 따라 ‘말이 되어야’ 한다니. 여전히 이성을 잠재울 수 없는 노아였다. 생각보다 고리타분한 면이 있다고 노아는 자가진단을 하고 말았다. 그리곤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예 이름을 불러서 찾는 사람이 알아서 얼굴을 내밀도록 작전을 바꿨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어서 나와!”

  노아는 어느 집 대문 앞에 서서 외쳤다. 그녀는 요령껏 대문에 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는 명패가 달려있게 했다. 확실히 이 집이 그 사람의 집이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2층의 현관문이 열리고 누군가 외곽 계단을 통해 걸어 내려왔다. 곧 대문이 열렸다. 노아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가 부른 사람을 기다렸다. 그가 얼굴을 내밀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두껍고 색이 옅은 입술, 거칠어 보이는 짧은 머리에 툭 튀어나온 목젖까지, 모두 그녀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헐렁한 검정색 티셔츠에 청색의 스포츠용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의 인상착의는 자주 이런 식이었다. 그가 빨간 잇몸을 드러내며 노아를 향해 반갑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란 참으로 묘하게 사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조금도 감추지 않으면서 한편으론 쑥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마음을 얼굴 표정만으로 전부 드러냈다. 노아가 그를 불러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언제나 그의 마음을 다 알고 부담스러워하면서 혹시 그와 원치 않는 때에 갑자기 사이가 깊어질까 불안해했음에도 노아가 꼽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자기편은 바로 이 사람인 때문이었다.

   “정현수, 너 나하고 함께 갈 수 있지?”

  뜬금없는 노아의 제안에도 그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곧장 대문에서 발을 빼 바깥으로 나왔다. 마치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노아가 싫어하지 않는 범위까지만 다가가 머리를 긁적이며 노아의 발에 시선을 둔 채로 노아에게 말했다.

   “누군지만 말해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너도 알잖아. 그 애들이 그랬던 거. 지금 걔네들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겠어?”

  노아는 반 정도는 눈으로 그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그녀는 분노가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노아는 잠시나마 느꼈던 죄책감을 불타오르는 증오가 억누르는 것을 느끼며 현수의 손을 잡고 무작정 걸었다. 노아는 많은 감정을 한 번에 느낄 수 있었다. 현수가 기뻐하고 있다는 것, 그 애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것, 그녀 자신이 희열에 차있는 것, 그리고 또 멀찌감치 따라오고 있는 데몬의 또 다른 감정 모든 것을 노아 혼자 다 알고 있었다. 노아는 데몬의 기분은 무시하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현수를 끌고 갔다. 노아가 현수에 대해 한 가지 마음에 들어 한 것은 오랫동안 복싱을 해왔다는 점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노아가 벌이려는 연출에 제격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동네 슈퍼였다. 물론 노아는 그때 처음 현수를 만난 게 맞다. 평소라면 잘 나가지 않지만 그날은 괜히 울적한 마음에 산책을 나섰던 것인데, 왠지 동네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허름한 구멍가게가 서글퍼보였다는 게 그곳을 들른 이유였다. 막상 가게에 들어서자 파는 물건이 몇 없어 머쓱하게 서 있다가 과자 한 봉지만 달랑 사들고 나왔었다. 그리고 노아는 첨부터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시선 때문에 과자 하나 사는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가게 입구에 펼쳐놓은 평상 앞에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며 서있던 남자가 주섬주섬 거스름돈을 챙겨 나오는 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아는 시선의 주인이 그일지 짐작 못하고 고개를 들다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검은 피부에 흰 우유가 턱 끝에 매달린 것을 보고 노아는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과자 봉지를 달랑거리며 걷는 노아의 뒤를 그가 쫓아왔다.

   “저기요! 저기…!”

  남자가 뛰다시피 노아를 쫓아왔다. 노아는 불안스러운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검은 얼굴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막상 노아가 멈춰 서서 자신을 쳐다보자 남자는 자신 없는 모습으로 시선을 딴 데 돌리며 말했다.

   “저기, 그게…. 혹시 이 동네 분이신가해서요. 접때 뵌 적 있는 것 같아서….”

   “네?”

  노아의 가슴이 세게 뛰었다. 그의 행동이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왠지 지금 일어나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평소에도 쉽게 단정 짓지 않는 신중한 성격의 노아였기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듣기 어렵기도 했다. 그녀가 느끼는 그 일이 아닐 수도 있었기에 노아는 단지 되묻기만 했다. 남자가 살그머니 노아의 눈으로 시선을 낮추며 말을 이었다.

   “제 이름이 정현순데요. 혹시 나 알지 않나…요?”

   “잘 모르겠는데….”

  남자가 손부채질을 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두 손으로 벌게진 얼굴을 쓱쓱 비비며 과장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 앞에 선 노아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알지도 못하고 별로 호감이 가지도 않는 낯선 사람의 낯선 행동을 보고 있는 게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땀으로 범벅되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노아는 딱히 땀 냄새를 싫어하지 않았지만 그날따라 그 냄새가 무척 불쾌하게 다가왔다. 그의 인상을 뜯어보며 노아는 자신에게 조금 실망했다. 그렇지만 이번 같은 상황은 결코 노아가 기대했거나 바랐던 것도 아니었고 노아가 자초하거나 일부러 만든 일도 아니었다. 노아의 손에서 벗어난 일이었기에 그녀가 어떻게 했어도 결국은 벌어질 일인 것이다. 그래도 약간은 후회스러웠다. 평소 가지도 않던 동네 슈퍼를 기웃거린 것이나 일도 없이 바깥에 나온 것, 쓸데없이 우울한 날을 맞이한 것 모두가 후회되었다. 그 순간 노아는 남자가 미워졌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 남자가 매우 혐오스러운 사람으로 변했다. 얼른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남자는 노아의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흥분하고 약간은 도취되어서 자기 몸을 어쩌지 못하는 짓을 멈추지 못했다. 한 차례 제자리 뛰기를 하더니 남자는 이런 적이 처음이라며 다시 말을 꺼냈다.

   “여기 이사 온 날 봤거든요. 그때부터 전 종종 눈인사도 했는데, 못 보셨구나. 그냥 딴 게 아니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단순히 ‘좋은 이웃’으로 지내달라는 부탁으로 말을 끝냈다는 것이었다. 노아가 말을 끊은 것인지, 그가 알아서 끊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노아는 그날 일어났던 잠깐의 사건을 밤새 되새겼다. 결론은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세상 모든 남자가 노아에 대해 적대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말이다. 노아는 자신에게 호감을 품은 사람이 젊은 남자였다는 사실만큼은 두고두고 다시 생각하기도 했다.

  얼마 뒤, 길에서 또 한 번 마주쳤을 때 남자는 노아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 노아는 이름정도는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아 부담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일이 남자에게는 무척 의미 있는 일이 되었던 것 같다. 한동안 남자가 노아를 만나면 스스럼없이 대했다.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인 것처럼 말이다. 노아는 그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고 싫은 티를 냈다. 그러다가도 죄책감이 들 때는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그러면 남자도 다시 노아 혼자 속으로 정한 선을 넘기는 행동을 해서 노아로 하여금 못되게 굴게 만들었다. 아무튼 그는 노아에게 애증이랄까, 묘한 관계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일부러 그랬던 건지, 아니면 그 자체가 그의 삶의 일부였기에 그랬는지 거의 매일 동네를 뜀박질했다. 또 집 앞에서 줄넘기를 했고, 나이키 로고가 거의 떨어져 나간 검정색 가방을 들고 버스를 타고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노아가 그에게 친절하게 구는 시기가 왔을 때, 그는 버스를 타고 늘 다니던 체육관에 노아를 한 번 데리고 가서 자기가 운동하는 모습을 구경시켜준 적이 있었다. 남자가 스파링을 뛰고 있을 때, 노아는 그 한 3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남자에게 호감을 가졌다. 만약 남자가 그처럼 진지하게 몰두하는 자신의 다른 모습을 노아에게 자주 보여줬다면 그가 원하던 일이 더 빨리 진행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3분은 짧았다. 성의 없는 레토르트 식품을 요리로 대접 받은 기분이 들 정도로, 3분은 너무했다. 그보다 남자는 늘 노아에게 몰두했다. 그건 정말 노아가 바라는 종류의 관심이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노아가 먼저 현수를 찾았다. 노아는 새삼 현수의 큼지막한 손과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와 마음이 녹는 듯했다. 그러면서 현수가 그리 나쁜 남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현수는 나쁜 축에는 끼지도 않았지만 문제는 노아의 취향이었다. 그녀는 들러붙는 남자라면 누구든 질색으로 싫어했다. 아주 간단하면서 어려운 문제였다. 서로 좋아하지만 절대로 가까이 들러붙지는 말아야 한다는 미묘한 딜레마였다.

  현수와 손을 잡고 달리는 노아의 앞길은 계속해서 모습을 바꿨다. 노아와 현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주변 풍경은 기다란 직선의 색 색깔뿐이었다. 노랑, 빨강, 주황, 파랑, 초록, 보라의 긴 줄이 죽죽 그어진 공간을 초고속으로 뛰었다. 노아의 머리는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단 한 번도 현수의 마음을 받아준 적 없었는데 이제와 그를 이용하기 위해 불러낸 것은 노아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수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미담이의 사주를 받은 그녀의 친구들이 노아를 에워쌌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현수의 단점을 모두 잊고 그와의 새 출발이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낙원으로 향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지금 노아는 누구와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일까? 생각이 이에 미치자 노아의 손을 잡고 달리는 사람은 현수가 아닌 데몬으로 변해버렸다. 데몬과 함께 무의미한 트랙 달리기를 하고 있는 노아였다. 끝이라곤 없는 원형의 트랙을 되풀이하듯 돌고 돌았다. 숨이 차지는 않았지만 짜증이 벌컥 나자 노아는 트랙에서 벗어나 데몬의 손을 뿌리치듯 놓아버렸다.

   “이게 다 뭐하는 짓이야?”

  노아가 절규하며 소리 질렀다. 데몬이 트랙 저쪽 편에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소!”

  데몬의 대답에 노아는 눈물을 참지 않고 터뜨렸다. 그녀는 큰 소리로 바닥을 구르며 울었다. 온몸으로 처절함을 표현하는 퍼포먼스처럼 보였다. 데몬은 노아의 극단적인 감정 변화에도 멈추지 않고 트랙을 달렸다. 그는 더 이상 휘파람을 불어주지 않았고, 빨갛게 물들였던 머리는 이제 파란색으로 변해있었다. 노아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면서도 데몬의 변화를 감지하고 살짝 긴장했다. 데몬이 달리는 평평했던 트랙이 늘어난 고무줄처럼 구불구불 언덕이 지고 있었다. 데몬은 파란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오르막과 내리막을 쉬지 않고 달렸다. 노아는 그가 그만 달리기를 원했지만 데몬은 노아를 위해 달리고 있었다. 노아는 데몬에게 명령하거나 부탁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데몬은 노아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운동경기장 둘레에 설치된 백색 조명이 하나하나 불을 밝혔다. 조명 뒤로 경기장의 출구가 보였다. 노아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불을 밝히고 있는 10개의 출구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몬은 달리기를 멈추고 노아의 반대편 끝으로 가서 섰다. 하얀 조명 앞에 서있는 데몬의 모습이 노아에게는 검은 실루엣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파란 머리카락이 언뜻 비쳐 보이지만 데몬의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다.

   “데몬. 데몬!”

  노아는 울부짖는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녀가 부르고 있는 것이 데몬인지, 데몬의 그림자인지 불분명해졌다. 검은 실루엣에서 그나마 푸르스름하게 비쳐보였던 그의 파란 머리카락마저 까맣게만 보였다. 사방에 빛과 통로가 있었지만 불길한 생각을 가라앉힐 수 없는 노아의 가슴이 두방망이질했다. 늘 그림자처럼 따라 붙던 데몬이 멀리 떨어지자 그의 마음은 더욱 알 수 없는 우거진 숲 속 깊은 동굴에 감춰진 어두움이 되어버렸다.

   ‘내가 잘못한 거야. 아니, 내가 잘못한 걸까?’

  첫 단추를 꿴 것이 자신인지, 데몬인지 저울질하며 그녀는 최대한 많은 추를 데몬 쪽으로 옮겨 걸었다. 책임을 회피하면 그가 다시 자기 곁으로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여기면서 못나게 구는 자기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데몬은 한 통로를 향해 걸어 나갔다. 통로에 가까워질수록 빛을 등지고 있었기에 그의 몸은 점점 어둠과 하나가 되어갔다. 처음엔 두 다리가 사라졌고 그 다음은 엉덩이, 허리, 그리고 어깨, 마지막으로 머리카락 한 올까지 캄캄한 어둠에 자취를 감추듯 스러졌다. 노아는 데몬에게서 풍기는 모든 것을 잃고 망연하게 자리에 우뚝 섰다. 그것도 잠시 그녀도 걸음을 떼었다. 10개의 통로 중 데몬은 첫 번째 통로로 빠져나갔다. 데몬이 사라진 걸 지켜본 노아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또렷해졌다.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여섯 번째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통로의 입구는 아치형이었다. 아치의 꼭대기에는 간판처럼 그림이 새겨진 석판이 하나씩 붙어있었다. 노아가 선택한 여섯 번째 통로의 입구에는 세 개의 직선이 60° 간격으로 비스듬히 가로지른 별 그림이 석판에 새겨져 있었다. 그 그림이 어딘지 낯익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며 노아는 통로 중앙에서 어둠 속에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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