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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일상

  어느 날부턴지 그녀는 일상을 걱정하던 때로 돌아와 있었다. 냉장고에 남은 반찬을 따져보고 다음 달 생활비 지출을 계산하고 지원의 낡은 외투가 눈에 들어왔다. 계절의 변화를 무심하게 이야기했고 여름에는 공용 텃밭에서 꽃구경하고 싶어 꽃씨를 샀다. 물론 모든 것이 전과 같지는 않았다. 평범한 일에도 금방 눈시울이 붉어지는 버릇이 생겼다. 여원은 눈물이 맺히면 울지 않으려고 얼른 다른 일에 신경을 돌렸다. 이제는 지민이 없이도 살아가고만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차라리 지민을 모르던 날로 돌아가고 싶어서 처절하게 울던 낮과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닥쳐도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던 그녀는 자기의 어리석음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전과는 사뭇 다른 눈빛으로 여원은 지나간 일들을 되짚었다. 책장에서 꺼낸 앨범을 한장 한장 앞으로 넘겨 바랜 글귀와 그림을 눈에 담았다. 어제인 듯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웃음소리가 사진을 매만지는 손에 닿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보다 더 아픈 사연들, 더 눈물 나는 사건들, 사람들, 비교하기 싫지만 그래도 한 번쯤 객관적으로 판가름해본다면 여원의 과거도 기록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함께 잠들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했다.

  책장 틈새에 앨범을 모서리부터 밀어 넣던 여원의 눈길이 조금 옆으로 가더니 이내 노란색 표지로 제본한 얇은 책자를 꺼냈다. 커피라도 쏟았던 것처럼 누렇게 번진 얼룩을 보고 여원의 눈엔 금세 눈물이 맺혔다. 한 번도 펴본 적 없는 새 책인데도 손 탄 듯이 부풀어 올라 쭈글쭈글했다. 겉면에는 놀이공원에서 찍은 학급 단체 사진이 컬러로 인쇄되어있었다. 눈물이 꺼질 틈 없이 지민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방울이 굵다랗게 툭 떨어졌다. 여원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가슴을 두드렸다. ‘참자, 참아보자.’

  한 뭉텅이로 붙어버린 종이뭉치를 한 쪽씩 살살 떼어냈다. 이름순으로 정리된 페이지를 넘기면서 여원은 책장에 기대어 앉았다. 절반쯤 종이를 떼어내니 그의 차례였다. ‘이름, 이지민. 생일, 2월 12일. 혈액형, A. 장래희망, 좋은 아빠, 그리고 두 번 살기. 이상형, 내가 좋아하는 사람.’ 여원의 입에서 울음 섞인 웃음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두 번 살기가 뭐야?”

  여원이 지민의 설문지를 들고서 물었다. 지민은 어렵잖게 대답했다.

   “다시 태어나는 거지.”

   “환생?”

  지민이 눈을 가늘게 뜬 채 허공을 보았다.

   “그런 거 말고. 지금의 나로 또 태어나는 거.”

  여원이 모호한 표정을 짓자 지민은 설명하기 싫은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판은 이미 끝났고, 두 번째 판은 새롭게.”

  쑥스러워하는 지민을 보고 여원은 설문지로 눈을 돌렸다.

   “다 아는 상태로 다시 살면 인생이 180도 달라지지 않겠어?”

   “그러려나?”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다가 여원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런데 너 뭐해?”

  여원의 설문지를 순식간에 조작해버린 지민은 막을 새도 없이 편집부 친구에게 종이를 넘겨주었다. 학교에서 조용히만 지내는 지민이 사실은 장난꾸러기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여원이 유일했다. 갑자기 벌어진 돌발상황에 여원은 표정도 행동도 어색하게 굳어버렸다. 지민은 저만치 떨어진 자리에서 귀 뒤를 긁고 있었다. 무안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방심한 나머지 여원은 참고 있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임여원. 9월 30일생. 혈액형, B형. 장래희망, 간호사. 이상형, 이지민.’

  교지에 올라간 기록을 보고 있으니 그날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구체적으로 최대한 많은 이상형을 적어놓은 여원의 글씨를 펜으로 긋고 그 옆에 적힌 날림 글씨를 보며, 지민이 남긴 마지막 선물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대로 두길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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