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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그림

  점심시간 즈음, 사장이 차 키와 핸드백을 들고 일어났다. 여원이 묻기도 전에 “별일 없으면 5시에 퇴근해. 나도 일 마치면 바로 집으로 갈 거니까 문단속 잘 하고.” 짧은 지시만 남기고 유리문 밖으로 나섰다.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멀어지자 여원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3시에 선주문한 로션 세트 10박스를 챙겨가기로 한 판매사원과 4시 반에 소포 수거하러 올 택배기사 말고는 업무가 한가한 날이었다. 사실상 5시 퇴근은 예정되어있었다. 여원은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을 전자렌지에 돌렸다. 동그란 유리판 위에 올라간 네모난 도시락이 천천히 회전목마 타듯 빙글빙글 돌아갔다.

 

  집을 막 나서려는 지원을 붙잡아 여원은 데운 우유를 건넸다. 지원은 얼떨떨하니 가만히 서서 우유를 들이켰다. 다 마신 컵을 돌려주고 문 손잡이를 돌리던 지원이 뒤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누나, 누나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 것 같아.”

   “갑자기 왜?”

  드디어 지원의 목구멍을 살살 간질이며 뱉어지기만 기다리던 목소리가 뛰쳐나왔다. 불편하게 집안에 끼어들어온 침묵은 기어코 쫓겨났다. 지원이 입을 연 것만으로 반가워서 여원은 그가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을 못 잡았다.

   “까먹고 있었는데, 누나 공부 되게 잘했잖아. 누나 고3 때 담임선생님이 볼 때마다 지나가듯이 그러셨거든. 지금이라도 대학 가는 거 안 늦었다고. 우리가 생활도 변변치 않은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나 듣고 넘겼지, 누나한테 물어볼 생각도 못 했어. 혹시 모르니까 더 늦기 전에 선생님 보러 와 봐. 그리고 이거….”

  지원이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준 것은 여원의 수능 성적표였다.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어.”

 

  전자렌지가 신호음을 내며 작동을 끝냈다. 여원은 도시락을 꺼내오면서 사무실을 휘 둘러보았다. 다른 사업장은 그래도 성수기라고 판매 실적이 나오는 모양인데, 여기서 일을 시작하고 사계절을 다 보내도록 영업 부진 꼬리표는 한 번도 남에게 뺏긴 적이 없었다. 판매사원이라곤 고작 네 사람이 달마다 제품만 양껏 받아놓고 한층 한층 쌓아놓기만 해서 사무실 절반이 재고 상자로 어질러져 있었다. 일도 많지 않고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상가라서 조용한 시간이 길다는 게 좋기도 했지만 오래 가지 않아 망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일터에서 언제 잘릴지 노심초사였다. 잘리거나 아니면 월급이 밀리거나 무엇으로든 여원과 지원의 생계는 점점 위협받는 쪽으로 몰렸다.

  막연하게도 대학을 나오면 지금보다는 형편이 나아지리란 확신이 들었다. 고졸인 지금보다는 훨씬 돈을 잘 벌 게 분명했다. 그러나 대신에 앞으로 대략 4, 5년은 궁핍하게 살아야만 했다. 다시 수능 공부를 해야 하고, 한 번에 원하는 대학에 붙어야 하고, 대학에서는 장학금을 타야 하니까 밤새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는 앞날이 훤히 내다보였다. 그런 뒤에 졸업을 준비하는 한편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이왕이면 큰 병원에 취직될 때까지 아르바이트에서 손 놓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길게 보면 40년, 50년을 매일 이렇게 살아가는 거랑 비교해서 눈 딱 감고 4, 5년만 고생하는 게 훨씬 나을 거야.’

  이번이 어쩌면 그녀 인생을 뒤바꿔놓을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랐다. 지원의 마음이 동한 걸로 모자라 평소 같았으면 아무에게도 부담 주기 싫어 강한 모습만 보였을 여원마저 이번만큼은 동요되었다. 단조롭던 마음의 색이 찬찬히 물들며 전에 본 적 없던 무지갯빛 그림이 그려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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