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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여원을 깨운 건 축축함이었다. 흐리멍덩하던 시야가 또렷해지며 엉덩이에서 다리까지 퍼진 저림이 정신을 마저 차리게 해주었다. 간신히 벽에 등을 기대고 저린 다리를 손으로 들어 쭉 뻗어놨다. 얼마나 오래 이러고 있었을까 궁금했다. 눈앞에 하얗고 반들반들한 조각 같은 게 보였다. 여원은 조각에 몸을 지탱해서 일어나 그 위에 주저앉았다. 여원이 있는 공간은 제자리 뛰기를 하기도 모자랄 만큼 아주 좁았다. '아, 변기였구나.' 여원이 의자삼아 앉아있던 조각상은 좌변기였다. 그러니까 그곳은 화장실이란 뜻이었다. 집은 아닌데 낯설지가 않았다. 병원 화장실 치고는 구식이었다. 병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기억의 심지를 점화시켜 불꽃이 연달아 터지듯 여원을 뒤흔들었다. 학교 앞에서 다급하게 세운 버스, 여원을 부축해서 길바닥에 앉힌 지원,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지민, 그를 구하기 위해 차도로 뛰쳐들어간 기억이 되살아났다.

   "임여원, 거기 있어?"

  밖에서 누군가 여원을 불렀다. 다리에 피가 돌아 저린 기운이 없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니 한 여학생이 화장실 입구에서 기웃거리다가 여원과 눈이 마주쳤다. 여학생은 여원을 위아래로 살폈다.

   "수업 시작했어."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던지곤 여학생은 자리를 떠났다.

   "수연이?"

  여원은 자기 입으로 한 말이 너무 뜬금없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된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고도 불현듯 떠올라 신기할 따름이었다. 무엇보다도 수연이가 아직도 교복 차림인 이유가 궁금했다. 진즉에 학교를 떠난 졸업생이 무슨 미련이 남았다고 교복 바람으로 활보하는 걸까? 여원은 뒤뚱대며 화장실을 나가다 말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세면대 위 커다란 거울이 그녀의 모습을 비췄다. 물에 빠졌던 사람처럼 여원은 홀딱 젖어 있었다. 젖은 옷의 불쾌감이 자신을 깨웠다는 걸 잠시 잊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과 목덜미에 들러붙어있어 여원은 머리를 하나로 모았다. '나도 교복을 입고 있어.' 가슴팍에는 노란 명찰에 '임여원'이 새겨져 있었다.

  천천히 화장실을 나왔다. 학급 팻말이 띄엄띄엄 붙어있는 긴 복도 한가운데에 그녀가 서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었다. 자기의 꼴도 익숙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여름에게 시달리던 고3 임여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설마 그럴리가 없다. 부정하기엔 그때의 감각, 감정이 생생했다. 꼬집어보지 않아도 알았다. 이건 분명했다. 과거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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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