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진짜 마침표

  이번 사태도 상당히 심각했다. 그러니까 이제 겨우 인생이 뭔지 눈을 뜰락 말락, 요람에 누인 난 지 한 달 된 젖먹이가 눈꺼풀 간신히 움직이는 만큼이 고작인데, 32살이 되었다. 1월 1일은 없다고, 내겐 32일이라고, 33일이라고, 31살 이상은 없다고 하고 싶으나 30대 초반의 끝머리로 오고 말았다. 내년은 30대 중반으로 가기 직전의 벼랑 앞에서 아슬아슬 버티는 나이가 된다.

  단지 나이를 이토록 먹어대기만 해서 문제가 복잡해진 건 아니다. 툭하면 이 사람, 저 사람 바꿔가며 가슴 설레오는 통에 나이 먹는 일이란 내 예상과는 다른 분야에서 형편없다는 걸 나날이 느낀다. 어릴 땐 모르던 감정을 주고받는 짜릿한 희열에 중독이라도 된 것 같다. 오고 가는 눈빛에서부터 지나칠 만한 말 한마디도 두고두고 회상하는 재미에 잠이 오지 않는다. 헛바람만 잔뜩 들어서 할 일은 태산인데 온 정신은 그에 쏠려 있다.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지난 12월 한 달은 어찌나 빠르게 흘러가던지, 아웃사이더의 랩이 정신없이 귓전을 때리고 지나가 가사를 다 놓친 것만 같다.

  그랬다 해도 여전히 별일 없이 무사태평하다. 마음 한구석 누구는 다행이라 하고, 누구는 저 고개 넘어가던 미련을 다시 데려와 꽉 끌어안고 놔주질 않으려 한다. 그러니 그들이 다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은 이 풀도 나고 저 풀도 나는 잡초밭이다.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마음 푹 놓고 역전의 일꾼으로서의 마음가짐만 단단히 먹고 모처럼 새 직장에 들어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으리라는 기대나 예상은 ‘요만큼의 요만큼’도 없었다. 그럴 만한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회사였다. 첫 출근을 한 날, 아침부터 요란한 목소리로 등장한 어느 사내 녀석이 있기는 했다. 어떻게 돌아가는 회사인지, 어떤 사람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떤 일들을 맡아 하는지 아직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에, 낯선 음색을 크게 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편했다. 나머지 인물들은 조용하거나 부드럽거나 조곤조곤한 말투였다. 데면데면하게 구는 사무실 공기는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지만, 호박 냄새가 배어나오는 공장 입구에서 낄낄거리며 담배를 태우는 남자애만큼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 달이 어떻게 흘러갔냐 하면, 어이없게도 그의 가벼운 관심이 맘에 들었다. 그의 이름으로 전화가 오면 고무줄을 퉁겨 맞은 사람처럼 깜짝 놀랐다. 짤막하게 나눈 몇 초뿐인 대화 몇 마디가 고스란히 기억에 콕 박혔다. 별일도 아니고, 별말도 아니고, 별것도 아닌 의미 없는 순간들이 입안 가득 침 고이게 했다. 꿀꺽, 하고 삼키면 그 소리가 모든 비밀을 폭로할까 봐 두려웠다.

  자제, 또 자제, 그리고 계속해서 자제하기 위해 얼마나 여러 번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가다듬고 다짐했는지 모른다. 큰 고비가 오기 전에 어서 이 시련이 끝나기를 고대했다. 이 시험이 빨리 끝나야 본연의 사명, 초심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나를 너무 잘 아는 모양이다. 그동안 나를 너무 몰라서 한참을 방황했다. 마주하기 싫으니까 궁색한 구색만 잔뜩 붙여놓고 그게 나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젊고 어리니까 자기를 혐오할 줄도 아는 것이다. 자기를 싫어하고, 싫어하고 아주 싫어해서 죽여버리고 싶기도 한 젊음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다는 걸 안다. 그러다 그것도 굉장한 자기애와 자기 집착의 결과물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고부터는, 진정으로 나이를 먹어가기 시작한다. 나와 타자를 분리하고, 나와 현재를 분리하고, 나와 나를 뼈와 살을 분리하듯 깨끗하게 갈라낸다. 그리곤 세상이 한 뭉텅이의 무언가로 보인다. 세상은 세상이고,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였구나, 하는 안도감이 비로소 나를 내려놓게 한다. 물론 이게 다는 아니었다. 모든 과정과 결과는 아니다. 다만 그런 맥락이 있기는 했다.

  문학 교수님은 내가 사춘기 아이들이나 갖는 자기 혐오의 때를 못 벗었다는 걸 알고 계셨다. 나도 알고 있었다. 영영 못 벗을 줄 착각했는데, 사태는 매우, 매우 심각해졌다. 32살이 되었다. 진지하고 심각했던 10대와 20대의 방황과 지독한 감수성과 제발 내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던 외로움은 서서히 옅어지더니 공기 중에 분해되었다. 그 향이 어땠는지 기억하려면 잠자코 눈감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서 도 닦는 자세로 종일은 앉아있어야 한다.

  대신에 그 누구보다 가벼워졌다. 무거울 필요도 없고, 무거울 일도 없다. 과거를 보낼 줄도 알게 되었다. 가벼운 호감, 가벼운 마음, 그마저도 모래 속에 넣어둔 손을 탁 털고 지체없이 저녁밥이나 먹으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갈 자신이 있다. 정말, 이제는 리얼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색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15
11월의 끝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