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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릿속이 하얗다. 무어라 표현할 새도 없이 많은 일들이 속전속결이다. 2년만에 영업을 접고 취직을 하고, 한달만에 봉급이 오르고 매일매일 새로운 일감을 받고 배우고 실수해서 소리도 듣고 그래봤자 인생이 다 여기서 거기고, 거기서 여기고 그런 생각이 들어서 별로 스트레스도 안 받고, 그 사이 회사는 이런저런 일로 휘청휘청 위기마다 거르지 않고 타격 받는 중인데, 집에서는 집안 일로, 회사에서는 회사 일로, 교회에서는 교회 일로, 그리고 각종 행사, 언니의 결혼이 코앞이고, 독일로 시집가는 다른 언니의 결혼은 이번 주고, 동생의 신학교 입학, 다른 동생은 내년은 일을 쉬겠다 하고, 친구는 워킹 홀리데이에 당첨돼서 캐나다로 유학을 가기로 하고, 다른 친구는 어릴 때 내가 살던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어떤 친구는 첫 애를 낳고, 어떤 친구는 둘째를 낳고, 사람은 너무나 많고, 사람마다 사건이 너무 복잡하도록 많이 벌어지고, 나는 그걸 다 기억하고 있기가 버거워서 정리정돈에 중독되었다. 자꾸만 치우고 쓸고 닦고 가지런히 정리하고 잘못 놓인 물건을 가만히 보고는 못 배기겠다. 그럼에도 바쁜 세상은 오늘이고 어제고, 내일도 모조리 모래 회오리처럼 빙글빙글 돌고 돌아 나조차도 빨려들어가 이 바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게 만든다.

  일기는 매일 내일로 미루고, 그래서 오늘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정리정돈, 어쩌면 일기를 써야 정신도 산란함이 조금은 가라앉을 텐데, 내일은 내일로 미루지 않았으면 하는데, 안타깝게도 내일은 또 다시 내일로 미룰 충분한 이유가 이미 있다. 어쨌든 나름대로 노력의 일환으로 오래간만에 궁둥이에 힘주고 포스타입에 들렀다. 글쓰기에는 인내가 필요하고, 인내의 끝에 아이디어가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 들어오기 위해 큰 결단이 필요했다. 어제도 시도해보았고 그 전에도 종종 들어와서 이 흰 창을 띄워놓기는 했었는데 이 네모반듯한 글자 하나하나를 모셔오기가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 참으로 모시기 힘든 귀한 분들이 따로 없었다. 의지력이 부족하기도 하다. 자기합리화의 달인으로서 스스로 갖은 핑계를 이유로 글쓰기를 미룰 대로 미뤄왔다. 잘난 작가들은 죽어도 자기가 세운 글쓰기 규칙을 지킨다고들 하고, 작가가 꿈인 지망생들에게 곧잘 조언해주는 부지런한 글쓰기 습관 중에 하나이지만, 나도 그렇게 하면 좋은 줄이야 알지만, 그러고보니 시민 작가 프로젝트에 냈던 참가신청서도 멋들어지게 탈락해버린 일이 있었다.

  아무튼 복잡하다 못해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 요즈음, 대강이라도 이 시간을 붙들어줄 글 한 토막은 있어야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은, 어떠냐면, 뭘 떠올리느냐에 따라 변화무쌍한 것이 사실이고, 녹아서 바닥에 푹 퍼진 젤리 같은 상태다. 젤리는 뇌가 없다. 'No brain, no pain.' 머릿속이 화이트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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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짧게 써 본 우울한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