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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이야기

  네 모습은 구름에 가린 해처럼, 하늘 밑으로 버티컬을 친 빛줄기를 닮았다. 미술실에는 네 오뚝한 콧날을 새긴듯한 조각상이 차분하고 단조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가 오던 날 하품을 하며 목 뒤를 긁던 너는 장대비 사이로 뛰어들었다. 너는 아름다웠고 내게는 무형문화재였다. 교과서를 깜빡 잊고 어쩔 줄 모르는 내게 자기 책을 줘버리곤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는 너란 아이, 승현아, 너를 만났어.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어. 이름 모를 숲에서 눈을 떴지. 그곳에서 한 소년을 만났어. 소년은 맑은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지.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선 모습은 마치 동상 같았어. 소년의 구불거리는 고수머리가 숲으로 불어온 바람에 흩날렸어. 그리곤 앙다문 입을 열어 내게 말을 걸었지. 나를 잊었냐고 물었어. 그는 낯선 소년일 뿐이었는데 그의 눈은 내 기억 깊은 곳을 찌르고 들어왔지. 난 솔직하게 대답했어. 널 모른다고 말했지. 소년이 고개를 돌렸어. 그의 흰 목덜미만 보아도 가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가 다시 말했어. 자길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하다니, 너무했다고.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아느냐고. 나는 미안하다고 했어. 소년이 우는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갔어. 그는 풀썩 바닥으로 뛰어내리더니 내 품에 안겼어. 너무나 외로웠다며 울었어. 그의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어. 가쁘게 쉬는 숨이 마음을 미어지도록 아프게 했어. 그러나 다시 그를 버려두고 올 수밖에 없었어. 잠에서 깨어나며 그를 더는 안아줄 수가 없게 되었어.

  그날은 아침 해가 유난히 밝았어. 버스에는 서로 다른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이 저마다 딴짓을 하며 말도 섞지 않고 있었지. 누군가 내 교복 상의 끝을 당기는 게 느껴져서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너무 놀라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어. 꿈속에서 본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거든. 승현아, 네가 내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고 했어. 네가 앉아있는 자리의 손잡이를 잡고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있던 내가 안쓰러웠나 봐. 괜찮다고 해도 너는 손수 가방을 벗겨 네 무릎에 올려놓았지. 그제야 너와 내가 같은 교복을 입고 있단 걸 알았어. 명찰의 색도 같았지. 등하교를 매일 같은 버스로 하면서도 한 번도 너를 본 적이 없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 나는 너의 친절을 빌미로 조금 더 용기를 내보았어. 몇 반이냐고 작게 물었지. 작은 목소리도 용케 알아듣고 대답해주었어. 나와는 멀리 떨어진 거의 끝 반이라고 하더라. 우리는 그 뒤로 통성명을 하고 얼굴을 마주치면 손 인사를 하는 사이로 바뀌었지. 맑고 화창한 날엔 뭉게구름처럼 뽀얀 미소를 지어주는 너를 보아서 기뻤고, 흐리고 찌뿌둥한 날엔 가볍게 장난을 거는 너를 보아서 즐거웠어. 너를 알게 되어서 모든 하루가 그전과는 달라졌어.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도 우리는 지망하는 과가 달라서 같은 반이 될 가능성이 없었지. 엉뚱한 망상을 하며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던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 네가 자연계가 맞지 않는다며 전과신청을 했던 거야. 세상에 이런 일이! 제발, 제발! 너는 내 꿈에 나온 아이였잖아. 우리는 어쩌면 운명적인 만남일지도 모르잖아. 너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 제발 기회를 주세요!

  그래, 그렇게 되었어. 한평생 운을 다 써버렸을 거야. 개학식 날, 같은 교실에서 나를 기다린 듯이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는 너를 보았어. 우리가 같은 반이 된 거야. 하마터면 소리를 크게 지를 뻔했어. 튀어나오려는 환호성을 힘들게 참으면서 네게 가까이 다가갔어. 이제 우리 매일 같이 등하교하자고 말했어. 최대한 참았는데도 이미 감정 통제가 안 되는지 제멋대로 말이 튀어나왔어. 어색해하는 네 표정 때문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지. 네가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완전히 자신감을 잃고 오히려 전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을 거야.

 


   “그래. 항상 하던 대로.”



  수야, 이렇게 만나서 더 반갑다. 언제나 반갑게 내 인사를 받아주는 너는 정말 착한 아이인 것 같아. 너와 아주 친하진 않아도 네가 참 괜찮은 아이인 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더 친해지고 싶고, 더 알아가고 싶었다. 있잖아, 도박이란 게 어떤 재미가 있는지 너 아니? 나도 이런 적이 처음이라 뭐라고 설명하긴 어려운데, 이런 맛이었구나. 너무 기뻐서 머리 꼭대기가 저리고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리게 놀랐어.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만 듣고도 나는 너일 걸 알았어. 내 말을 믿을 순 없겠지만 정말이야. 너를 만나려면 내게 다른 방법은 없었어. 부모님의 반대에도 우격다짐으로 과를 바꾼 건 전부 너 때문이었어. 그리고 교차지원이 훨씬 유리하다는 내 말이 그다지 신빙성 없는 소린 아니어서 부모님도 끝까지 반대하진 않으셨어. 그래도 우리가 만나려면 아직도 많은 경우의 수가 남아있어서 전혀 안심이 안 되었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너를 못 만나면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 게 될 거라는 어두운 마음만 들어왔어. 네 마음도 모르면서 함부로 너에게 다가갈 수가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넌 내 불안을 한 번에 꺼트렸어. 샛노란 병아리같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네가 말했어. 매일 함께 다니자고.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어. 네 얼굴이 점점 빨갛게 색칠되는 걸 보고서는 더 깜짝 놀랐어. 어쩌면 너도 내 마음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어.

  수야, 가끔 내 얼굴을 그려주어서 고마웠어. 네가 준 그림 선물 몇 개는 내 방 벽에 붙여놓고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그걸 보곤 해. 그러다 보면 개학식 때의 네 모습이 떠올라서 자꾸만 혼자 웃음이 새어 나와. 넌 나쁜 아이야. 너무 착해서 나빠. 얼마 전에 너의 비밀 이야기를 듣고 요새 나는 너무 행복해. 행복해서 죽어버릴 것 같아. 넌 정말 나쁜 아이가 맞아. 꿈속에 나를 방치해두고 얼마나 나를 오랫동안 외롭게 한 거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잘 사는 동안 나는 네 꿈속에서 얼마나 외롭고 슬퍼했겠어? 앞으로는 나를 절대 잊지 말아줘. 계속 나를 기억해줘. 꿈에서 만난 그 아이, 다시 만나면 이제는 잊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그때처럼 오래오래 안고 있어 줘. 그 오랜 외로움과 슬픔이 다 지워지도록 영원히 네 품에 나를 안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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