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6년 전만 해도 지난 날들을 회상하고 추억하는 건 즐거운 취미생활이었다. 자주 쓰진 않지만 기록할 일이 차고 넘칠 때면 휘갈겨 남기는 일기장 몇 권을 갑자기 찾아내어 들추어 본다든지 앨범을 열어 본다든지 주고 받은 문자 따위를 읽어보는 일 따위로 머리카락에 불 붙듯 쉽사리 몇 시간을 날려버린다. 그러나 부끄럽고 불쾌해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
어제 오후, 강설을 듣다가 ‘미움 받을 용기’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이 문구는 한창 세간에 오르내린 적 있는 어느 책의 제목인 걸로 안다. 처세술 관련 서적을 싫어해서 읽어본 적은 없지만 제목을 잘 지어서인지 주제의식이 선명히 보인다. 요즘 유난스럽게들 ‘토닥토닥’ 해주는 말이나 ‘공감능력’에 무척 열을 낸다. 먹고 살기 좋아진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이 그 ...
먼지가 풀썩이자 황홀경에 닿은 그는 또렷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침묵을 깨기 위해 그의 입은 천천히 벌어졌다. 비록 오래전부터 어두운 그림자만이 그의 유일한 동반자였지만 잠깐 만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어둠은 물러가고 영롱한 빛이 그의 얼룩진 면면을 환하게 드러내주었다. 그랬다. 여전히 세상은 밝고 아름다웠었다. 지금에야 그는 오랫동...
때로 나는 누군가에게 할 말이 있지만 그에게 직접 할 수 없으면 상상으로 대신 할 때가 있다. 물론 나는 그 할 말을 그에게 직접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그 사람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게 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도중에 내 말을 막거나 듣지도 않고 거부하거나 시종일관 자기변명으로 자기를 꽁꽁 싸매고 조...
작년 3월 첫 모임을 시작으로 아직 1년은 채우지 못했지만 해가 바뀌어서 새로운 시작점에 온 느낌이다. 9명의 멤버가 윤독방(카톡 단톡방)을 지키고 있지만 꾸준히 참여하는 멤버는 대여섯 명이다. 절반 정도의 멤버라도 돌아가면서 윤독에 참여하고는 있는데 우습게도 1/3의 멤버가 한 식구라서 가끔은 우리끼리 뭘 하는 걸까 싶다. 작년 한 해를 여러 차례 되새겨...
생각이 너무 많이 든다. 이 생각, 저 생각. 한가해서 그렇다. 퇴사해서 요즘 시간이 많거든. 독일인 남편을 따라 독일로 시집을 간 수현언니가 거의 1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자가격리 기간을 제외하면 약 2개월을 지내다 간다. 퇴사도 했고 해외에 가볼 기회는 지금뿐인 것 같아서 언니가 돌아갈 때 함께 독일편 비행기를 타볼까 계획 중이다. 언니는 이미 가기...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다는 뻔한 명제가 나타날 때면 사고라든가 시야라든가 그런 것들이 일시에 정지를 당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어떤 확장이나 집요함이 가로막히고 오도카니 엉뚱한 섬에 혼자 앉아서 메아리도 치지 않는 헛웃음을 '허허' 내뱉다가 집어삼키는 기묘한 무안함을 겪는다. 때로는 무안하고, 때로는 진부하고, 때로는 맥락이 없는 소리일 뿐인...
콜은 부유하는 먼지 같은 행성에서 태어났다. 그 행성은 죽도록 작고 보잘것없었다. 그 눈에 띄지 않는 행성은 고요히 허공을 떠다녔는데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잔잔한 공회전은 계속 되었다. 콜의 따분한 행성을 지켜보던 특별한 행성의 마지가 콜을 불러냈다. 자기 행성에서 하루쯤 놀다 가라고 말이다. - 거긴 너무 지루해 보인다, 콜. 마지의 음성이 콜에게 ...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현명한 기다림'을 세 강 남기고, 우리는 다음 책으로 갈아탔다. '현명한 기다림'은 이미 제목에서 모든 얘기를 다 해주는 책이었기에 챕터가 바뀌어도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대화는 한정적이었다. '거럼~ 거럼~ 조바심내지 말고 주님 의지해서 얌전히 잘 기다려보세!'하고 서로 손바닥 짝짝꿍 마주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이 책을 하면서 기대...
그게 어떤 '척'이든 '척'이라면 일가견이 있다. 아마 타고난 거짓말쟁이가 아닐까? 수도 없이 많은 거짓말로 철통같이 지켜내는 중이다. 무엇을 지켜내는 걸까? 진심을 보이면 상처를 받기가 쉽다. 무언가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서 너무나 갖고 싶어도 그런 티를 내어선 안 된다. 갖지 못할 테니까, 갖고 싶어 한 적조차 없어야 한다. 그럼 미련이란 게 남지 않고 ...
예기치 않은 만남으로 이루어진 시간의 조각이 하나 더 생겨났다. 여전히 우주를 유영하는 미지의 인생살이를 거치는 와중이었다. 발은 길에 닿지 않고, 길은 눈에 보이지 않고, 허공은 공허했다.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식사 약속이 잡혔다. 연휴의 중간, 그리고 금요일의 중간에 점심 약속이 살짝 걸터앉았다. 수요일, 지애와 명동을 갔다. 마침 꿔바로우에 꽂혀 ...
이런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오후 7시면 부리나케 짐을 싸들고 사무실을 내팽개치듯 튀어나온다. 흰색 승용차에 빨려들어가 시동을 틀고 안전벨트를 차고 기어를 바꾸며 엑셀을 밟는 동안, 드디어 이 회사에서는 유일하게 내 공간이랄 수 있는 곳에 들어와있다는 안정감이 한 칸씩 차오른다. 주차장에서 종일 가만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동생의 작은 차 한대가 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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